수십만 마리의 몬스터를 도륙하고 세상을 수십번은 넘게구하고도 남은 영웅들이 즐비한 요즘 온라인 게임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들겠지만, 예전에는 광물만 캐도, 다람쥐를 잡아 열심히 도토리만 모아도 즐거운 때가 있었다. 최초의 MMORPG라 일컬어지는 울티마 온라인(울온), 국내 최초 MMORPG 바람의 나라를 기억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이 때의 재미가 단순히 추억보정 때문이라고 폄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울온의 초심과 정신을 저버린(?) 정규서버 이용자가 줄어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지만, 클래식 버전을 기본으로 한 프리서버는 그 명맥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최근 이슈가 됐던 바람의 나라 클래식 서버도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얼마나 요즘 게이머들이 옛 게임을 그리워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온라인 게임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던 광란의 2000년 초반, 오픈베타만 하면 수만명은 그냥 몰리던 그 시절 인기를 끌었던 수많은 게임들은 지금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들이 철저하게 외면받게 된 이유도 궁금하다. 혹자는 월정액에서 부분유료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캐시템으로 인해 게이머로부터 외면받았다고 평가한다. 일리있는 말이다. 요즘 게임사들의 운영작태는 말 그대로 눈 뜨고는 보기 힘들 정도다. 게임 밸런스를 심각하게 해치고 게이머들이 애써 일궈놓은 경제 시스템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면서 사행성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는 게임을 보고 있노라면 도박 게임에 MMORPG라는 옷만 대충 걸쳐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 그렇지만 온라인 게임이 망하게 된 데는 사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게임에 철학이 없다. 생각이 없다. 장인 정신이 없다. 참신함이 없다. 재미가 없다. 없는 것 투성이(?)인 요즘 게임에서 빠진 것을 하나 더 얘기하자면 '어려움'이 없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본다. 우리는 왜 울온에서 광물을 캐고, 철광석이 아니라 브론즈를 처음 캐기 시작했을 때 즐거움을 느꼈을까. 수시간이 걸리는 노가다 끝에 겨우 철에서 브론즈로 광물 색이 바뀐 것 뿐인데 게임으로서 즐길 수 있었다. 곡괭이 클릭하고, 광산바닥 파고, 당나귀에 싣고, 용광로에 가져가서 철괴를 만들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금 혼자하라고 하면 지루해서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했던(게다가 비싼 타임쿠폰비까지 지불하면서!) 울온의 매력은 '어려움'이었다. 안전한 광산은 경쟁자가 많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광산을 찾게 된다. 이때부터 게이머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광부는 전투능력이 없다. 힘겹게 얻어낸 수확물들은 잔뜩 가지고 있다. 그렇다보니 악당들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곳곳에서 자신과 짐말을 노리고 튀어나온다. 때론 동료 광부인척하며 도둑질을 하고 아예 대놓고 팀을 이뤄 광산을 봉쇄하고 광물을 강탈해 가기도 한다. 내 노력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런 긴장감이 노가다 작업을 재미있는 놀이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울온의 광부뿐만 아니라 다른 생산직, 전투계열 모두에서 플레이어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어려움'이 존재했다. 그것이 초기 울온의 성공요인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PK가 금지된 안전한 신대륙이 만들어지고 이제 더 이상 플레이어들은 불안에 떨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작업에 마음껏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금씩 울온의 아성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각종 생산작업이 모두 단순 노가다로 변질되었다. 이 외에도 초기에 의도적으로 설계한 불편함을 '개선'하는 패치가 속속 업데이트 되면서 전투건 생산이건 중간과정에서 오는 모든 긴장감이 사라지고 끝없는 유저간의 성장일변도의 경쟁과 지루함만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옛 고전 온라인 게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인가하면 요즘이 더 심하다. 한가지 예만 더 살펴보자. 던파를 오베 때부터 접한 유저로서 흥망성쇠를 지켜봐왔다. 혹자는 키리의 믿음이라는 충격적인 강화이벤트를 계기로 던파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근본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이미 그전부터 던파는 출시 당시의 매력을 잃었다.

 

던파가 처음 출시되었을 때 아차하면 코인 하나는 그냥 날아갈 정도로 던전 난이도가 상당했다. 오죽하면 주로 등장하는 몬스터인 고블린을 따서 고블린앤파이터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던전 난이도가 상당하다보니 피격에 다들 민감했고 컨트롤에 신경써야 했다. 오락실에서의 긴장감을 맛볼 수 있었다. 당연히 아이템에 대한 욕구도 상당했다. 각종 퀘스트 노가다도 다들 즐겁게 수행했다. 사냥수익이 불안정한 플레이어에게 단비와 같은 안정적인 수익원이었기 때문이다. 수리비가 상당하고 물약값도 비싼데 자칫 실수해서 파티가 전멸하면 클리어 보상도 받지 못하다보니 던전에 들어설 때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파티원 3명은 코인도 없이 다 죽고 남은 한명이 보스전을 치루는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광경도 자주 연출됐다.

 

게임 경제도 문제없이 작동했다. 초보들은 던전내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모아서 물약을 만들고, 어느정도 골드에 여유가 있는 게이머들은 이들을 소비하며 사냥에 임했다. 초보들의 사냥수익은 언제나 비용대비 아슬아슬한 수익정도에 그쳤고 그나마도 파티가 전멸당해 투입된 자원을 전혀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운수 좋은 날 어둠의 선더랜드에서 학자의 토시라도 하나 줍는 대박을 기다리며 즐겁게 던전을 클리어 해 나갈 수 있었다. 말도 안되는 골드와 파워 인플레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모두가 고만고만,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매너는 자동으로 싹텄다. 어려운 상황에서 다들 실력있는 동료를 원했고 안정적으로 나름의 동료풀을 형성하려면 매너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에버퀘스트, 다옥 등 여러 고전 온라인 게임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별히 그 당시 게이머들의 더 착했다거나 운영진이 엄격했기 때문이 아니다. 요즘에야 반말을 기본으로 깔고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마구 배설해내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게임에서 동료가 그다지 필요없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분명 장르는 온라인인데 오프라인과 다를 바 없는, 나와 NPC의 교류 정도만 이루어지는 상황인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피격모션 및 경직시간 단축을 시작으로 게임 난이도 '개선'에 들어갔다. 게임 난이도는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던전은 클리어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빨리 클리어하느냐의 타임어택 대상으로 전락했다. 레벨만 맞으면 혼자서도 거뜬히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다. 점점 물약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 이상 피씨방이나 이벤트로 나눠주는 코인도 고맙지 않았다. 던전이 워낙 쉽게 넘어가다보니 관련 정보나 공략도 필요없고 스토리 따위는 더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차피 순식간에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텐데 보스패턴은 알아서 뭐하고 얽힌이야기는 알아봐야 뭐할건가. 협력이 필요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교류할 일도 적어졌다. 현실세계에서 친분있는 사람끼리 이뤄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ㅇㅇ', '즐겜'으로 나타나는 단발적인 교류만 이뤄졌다.

 

이것뿐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당장 경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리비도 낮아지고, 물약소모도 없고, 99.9% 던전트라이가 성공하다보니 클리어 보상도 게임세상에 무서운 속도로 쌓이기 시작했다. 인플레가 점점 심해지자 운영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인 강화시스템을 도입했다. 하지만 나중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게임에 다 있는 이 강화시스템은 사실 그다지 게임 인플레이션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체감인플레이션을 늘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강화에 소모되는 골드량이 플레이어들의 총 수익 대비 생각보다 많지 않다. 강화 성공확률은 마냥 낮출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는 성공한다. 강화에 성공한 아이템은 플레이어의 골드 수익을 증가시킨다. 골드소비 콘텐츠가 강화밖에 없을 경우, 극악의 확률을 뚫고 탄생한 고강화 아이템들에는 그간 쌓인 천문학적인 골드가 몰려 플레이어들에게 비현실 숫자를 보여줌으로써 체감인플레는 훨씬 커진다.

 

근본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다보니 이후 어떤 조치를 취해도 괴랄한 옵션의 아이템으로 대변되는 파워인플레와 골드 인플레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게임이 쉬워지면 벌어지는 또 하나의 문제는 플레이어 간 격차가 좁혀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잃을 일 없고 계속 쌓이기만 하는 상황에서 똑같은 시간을 투입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기존 유저의 압승이다. 플레이어의 실력이 격차를 줄이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저층은 먹이사슬 상위에서 게임을 즐기는 자와 그 객체가 되는 자로 급격히 나뉘기 시작한다. 이런 격차를 좁히기 위해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다. 게임에 투입하는 시간을 늘리거나 캐시를 지르는 방법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상대의 실수를 나의 기회로 삼을 수도 없고, 게임이 쉬워서 실수할 일도 없고, 실수한다고 해도 패널티 따위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캐시, 어느쪽이건 플레이어에게 썩 마땅찮은 일이다. 결국 점점 유저는 이탈하게 되고 개발사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마침표를 찍었던 사건이 '키리의 믿음' 이었을 뿐  이미 그전부터 근본원인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본 포스팅에서는 두 게임만 다뤘지만 사실 위 현상은 모든 온라인 게임에서 나타난다. 잘 설계된 게임 출시 → 작품성, 게임성 인정받음 → 캐쥬얼 유저 유입 → 게임 난이도 대폭 하락 → 1차 유저 이탈 → 신규유저 확보를 위한 추가 업데이트 (난이도 하락, 캐시템 업데이트 등 보통 패착으로 귀결) → 골드와 파워 인플레 시작 → 마지막 돈빨아먹는 업데이트 실시 → 끝

 

여기서 혹시 이 글을 캐쥬얼 유저를 비난하는 하드코어 꼰대 글로 오해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는 절대적으로 개발사의 문제다. 애초에 캐쥬얼 유저가 그 게임을 즐기게 된 이유는 게임이 가지고 있는 초기의 게임성과 매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멋대로 판단해서 게임이 초심을 잃고 섣부른 욕심을 부리게 되면 이도저도 아닌 평범한 게임이 되고 결국엔 망겜이 되는 것이다. 관광산업에서도 그런 예를 이미 충분히 많이 봐왔다. 중국인이 많이 온다고 전국을 중국사람 취향에 맞추면 구태여 관광객이 '유사'중국에 방문할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게임성에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항상 개발사는 결국 몇몇 '징징이'들의 의견에 휘둘려 왔다.

 

온라인 게임을 즐기지 않은지 근 10년이 되어가지만 게임팬으로서 특정 장르가 위축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포털사이트에서 30분만에 레벨 50!! 플레이 한시간만에 전설 아이템이 내손에? 이런 광고를 보고싶지 않다. 도대체 그렇게 레벨을 올리면 무슨 의미가 있고 그렇게 얻은 전설 아이템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다. 게임에서 적절한 '어려움'이 빠진다면 단순 노가다에 불과할 뿐이다. 시간을 들여서 얻어낸 아이템들은 사실 데이터 쪼가리일뿐이다. 정성들여 키운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있는 이유는 이것을 이뤄내기 위한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알던 리니지는 꽤나 거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채랩, 호랩이 강함을 나타내는 한 척도일 정도로 파워 인플레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말하는 섬의 학살자 셀로브가 어디서 나올지 항상 긴장해야 했다. 피케이는 더 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 눈 앞의 촐기(!)는 그야말로 기쁨 그 자체였다. 고렙들 싸움에서는 어떤 아이템이 떨어질까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몬스터와의 사투 끝에 물약이 모자라 결국 패배하고 레벨이 깎이는 아픔도 겪었다. 애써 마련한 아이템이 슬라임에 먹히는 것을 보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던 아픈 기억도 있다. 요즘 온라인 게임은 게이머에게 어떤 재미와 가치를 주고 있는지 알고 싶다.

 

게임에 어려움을 허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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