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RPG는 추락하고 있나

2018. 12. 25. 00:46

이제 더 이상 Min-Max 캐릭터는 그만


우리는 왜 RPG에 매력을 느꼈을까. 십중팔구는 내가 저 세계에 가게 되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망상아닌 상상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현대의 지금 세상의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왠지 화면 건너편 상상의 세계로 가게되면 나도 뭔가 굉장한 영웅 또는 악당이 될 것 같은 그런 기대가 있었다. 녹스가 그랬고 울티마가 그랬다. 어떤 계기로 나는 판타지 세계로 간다. 두근두근 모험의 시작이다. 


하지만 90년대의 RPG감성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은 RPG에 열광하지 않는다. 좋았던 추억, 옛날얘기 정도에 그친다. 왜일까. 더 이상 감정을 이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이입이 없는 RPG만큼 재미없는 RPG도 없다. 감정이입만 돼도 우리는 종이시트 하나, 주사위 하나에 TRPG라는 이름 아래 재밌게 놀 수 있었다. 감정이입이 없다면 RPG라는 장르는 사실 성립이 불가능하다. 아마 그래서 액션이든 스릴러든 아케이드건 뭐건 간에 생존을 위해 RPG는 뭐든 결합하고자 노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어떤 TRPG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왜 온전히 RPG에 빠져들 수 없을까. 이 캐릭터와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재미를 위해 내 마음대로 캐릭터를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대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라인게임 때문이라고 섣불리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괜히 눈을 흘겨보게 된다. 수많은 사람과의 경쟁 또 경쟁,  종적인 성장 위주의 콘텐츠 속에서 모두 최고만을 최고의 가치로 바라보게 되었다. 현실의 나는 최고가 아닌데 게임의 나는 최고가 돼야 한다. 현실과 상상, 상상과 판타지의 괴리, 그래서 괴물이 탄생했다. 바로 Min-Max 캐릭터다.


극단을 달리는 캐릭터다. 마법사는 지능이 뛰어나고, 파이터는 힘이 넘치고, 궁수는 민첩이 극에 달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D&D 룰에 따르면 요즘 RPG의 마법사는 마법없이는 5살 꼬마애한테 팔씨름도 지는 수준이고 파이터는 덜떨어진 힘만 센 바보에 간단한 돈계산도 하지 못할 터다. 궁수는 얼굴만 번듯한 미남미녀지 바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제는 또 어떤가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대책없이 선하거나 자신이 따르는 신이 시키는대로 따라서 최대한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캐릭터에 필요한 능력치만 몰빵한 결과다. 어중간한 능력치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게임 설계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필요한 능력치에만 몰빵하게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는 더 이상 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천재인가? 힘이 장사인가? 체조선수만큼 날쌘가? 여기에 대한 물음이 능력치로 표현된다. 마법사 캐릭터를 선택했다. INT를 18을 찍었다. 당신은 9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 중 운석을 소환하여 적을 박살내는 마법도 포함된다. 운석의 위치와 궤도를 계산하고 포털을 열고 운석이 떨어질 곳을 향해 또다른 포털을 열고 적을 정확히 맞추기 위한 계산까지 마친다. 곧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이런 캐스팅을 차분히 마칠 수 있는 천재라고 한다면 현실세계에서 천재라 일컬어지는 아인슈타인, 폰노이만 정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도저히 내가 대입되지 않는다. 힘이 18/100, 19라고 보자. 오우거 정도의 힘이다. 사람을 맨손으로 찢어발길 수 있을 정도다. 백수십키로의 무게를 지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다. 일단 나는 아니다. 현실의 내가 감정이입이 되든지 다다를 수 없는 능력치를 찍었을 때 짜릿함이 있어야 하건만 요즘 RPG에는 그런 느낌이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비록 속편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필라스오브이터니티의 시도는 신선했다. 중간 능력치에 의미를 둔 것이다.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서로 '우연히' 만나 파티를 구성하는 그런 상황이 말이 안된다고 제작자는 생각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영웅의 모습이 어떨지 생각해보자. 힘만 센 바보, 괴팍한 천재, 백치미 넘치는 사제, 날래기만한 도둑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되려 우리와 비슷하지만 우리와는 또 다른 불굴의 의지로 자신을 갈고 닦은 모습이 아닐까.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하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현재는 POE를 제외한 대부분의 게임은 중간능력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만을 위한 캐릭터를 만들 수 없다. 모두가 극단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밖에 없다. 힘이 14만돼도 동네? 아니 도시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 축에 속하겠지만 요즘 게임에서는 '망캐'다. 지능도 마찬가지다. 민첩성도 마찬가지다. 결국 극단적인 이상한 놈들만 게임 세상에 우글거린다. 


옛날 옛적에 '게임잡지'라는 것이 있던 시절 어떤 기자는 온라인 게임에서 역할 놀이를 제안했던 적이 있다. 더 옛날에는 온라인 세상에서의 나는 캐릭터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게임의 나와 현실의 나는 동일한 캐릭터가 되었다. 그래서 게임의 나와 현실의 나를 분리해서 게임의 나에 맞춰 역할놀이를 하자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예상했던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유치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글을 읽었던 나는 매우 공감했다. 게임을 게임답게 즐기자, 그리고 같이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시대가 너무 흘러 이제 진짜 '역할놀이'를 하자는 요구는 낯부끄러운 일이 되었지만 능력치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를 대입할 수 있는, 내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제작사에 이런 캐릭터도 이 세상에서 활약할 수 있게끔 패치를 해달라고 요구는 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의 나는 이 세상에 있으나마나한 존재인데 게임세상에서라면 어쩌면 우연한 계기로 마법을 익히거나 아이템을 갖춰서 전사로 거듭날 수도 있지 않을까. 평범하지만 뜻있는 사람들과 만나 세상의 운명을 우연히 결정지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의 게임 세상에선 현실의 나 정도 능력치로는 또다시 현실의 나와 똑같이 아무런 활약도 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게된다. RPG를 즐길 이유가 점점 없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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