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노동(직장 회식)

2018. 10. 17. 15:32

일하지 않은 자, 게임도 하지 말라



일도 늦게 끝나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에 얼른 씻고 푹 쉬고 싶은 그 때, 들려오는 지나치게 가볍고 쾌활한 사운드. 


'다들 고생했으니 저녁 번개 합시다.'


번개? 갑자기 잡는 약속을 이르는 은어? 요즘에도 이런말 쓰나? 11시가 넘었는데 왠 저녁? 내일 출근은? 


번개라는 단어 한마디에 머리 뒤로 진짜 번개가 치듯 여러 물음이 줄기를 친다. 회식은 너무 무겁게 들려 젊은이들이 부담스러워하니 번개를 제안한다는 친절한 설명에 동의여부야 어쨌건 고개가 끄덕여진다.


회식에는 참 많은 이름이 있다. 번개, 모임, 간단한 식사, 한턱, 자리, 뒷풀이, 업무의 연장 등이 그것이다. 회식의 본질(?)을 숨겨 남을 꾀어내려는 시도도 보이고 회식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도 보인다. 우리들 아랫것들 입장에서 보면 회식은 먹노동이라고도 부를 법하다.


근무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지만 먹노동을 마치기 전에는 편히 쉴 수 없다.


사내 이기주의, 삭막한 인간관계, 소통 부재, 만성피로, 매너리즘의 치료제


현대인의 포션..


오늘은 회식이다. 업무에 치여 하루하루 챗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 속의 새로운 자극이다. 각자의 바쁜 업무는 오늘 하루 정도는 뒤로 미루고 일찍 회사를 나선다. 언제나 긴 시간 얼굴은 맞대고 있어도 깊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직장 동료와도 술한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친해질 수 있는 기회다. 적당히 술기운을 빌려 못했던 말도 하고 업무를 하며 생겼던 불편한 감정이나 응어리를 풀 참이다. 

1차에서 2차로, 2차에서 3차로 갈수록 관계가 점점 더 돈독해지는 것을 느낀다. 뺀질이들은 하나둘 떠나고 진국들만 남았다. 술잔이 오고갈수록 부장님 차장님 같은 딱딱한 호칭보다는 친근한 형님 소리가 더 많이 들리기 시작한다. 회사에서는 자판만 두들기는 로봇 같았는데 여기서는 소리치고, 웃고, 울고, 얼굴을 붉히고, 하소연하고, 맞장구를 친다. 열심히 일하다보니 이런 신나는 일도 있구나. 회사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들 재미없는 사람들은 아니었구나. 술기운에 더 내달리고 싶지만 내일 출근을 위해 멈춘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다.


회식이 누군가에겐 이런 존재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회식과 강요의 환상 케미


사실 회식은 원하는 사람끼리만 하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회사 돈으로 맛있는 것 먹고, 사람과 어울리고 좋은 사람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된다. 회식의 효과 자체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가는 추세지만 득될 것 없다고 치더라도 크게 해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눈치를 본다. 그래서 강요를 한다. 끼리끼리만 노는 것처럼 보일까봐, 부서업추비를 마음대로 쓰는 것처럼 보일까봐, 나만 놀기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부서 장악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까봐, 되도록 많은 사람의 '자발적인 참여'를 강요한다.


문제는 강요를 하게 되면 회식으로 얻고자 했던 모든 효과들이 깡그리 사라진다는 점이다. 강요받은 사람은 강요한 사람의 바람과는 달리 회식을 즐겁고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억지춘향으로 분위기나 맞추려고 표정관리나 하는 와중에 인간관계가 좋아질 수는 없다. 이미 억지로 끌려온 시점에서 소통한다는 느낌도 받을 수 없다. 고장난 레코드처럼 반복되는 자기만 신나는 무용담, 옛날 얘기, 업무 얘기, 훈계 등등 듣고 있노라면 피로가 몰려온다.


강요 문제는 참석여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음주는 회식에서 빠지지 않는 필수 요소다. 구성원이 모여 함께 먹으면 그냥 회식으로 쳐도 될텐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밍숭맹숭하다느니, 그냥 식사한 것 뿐이라느니 하며 회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보니 회식이라고 하면 참석자에게는 음주 의무가 부여된다. 


'뱃속의 아기도 미리 조기교육이 필요하다' , '간은 종종 술로 소독해줘야 한다' 


소독드립은 어디 교본에라도 써있는 지 어딜가나 한두명은 꼭 하는 소리다.


농담 같지도 않은 저질 농담을 곁들인 강요를 듣다보면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도 불편해진다. 분위기를 망친 건 술을 강요하는 사람이건만 명확한 상하관계 덕분에 그 과오는 아랫것에게 전가된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불경죄다. 마실 능력(?)이 있음에도 잔을 거절하는 행위는 사정이 뭐든 상사의 자존심, 인생, 철학, 가치관을 짓밟는 행위다. 젊은 나이에 간암이라도 앓고 있지 않은 이상 분위기상 결국 마실 수 밖에 없다. 


체질적으로 술을 한잔이라도 마시면 아주 크게 탈이나는 A의 이야기다. A는 자신의 체질을 이유로 상사인 B의 술강요에 응한 적이 한번도 없다. B는 A가 의심스럽다. 분명히 어디선가 A가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자기 앞에서는 절대로 마실 수 없다고 뻗대니 못마땅하다. 구슬려도 보고 윽박도 질러보고 얼굴도 붉혀보고 업무적으로도 압박해봐도 요지부동. B가 입버릇처럼 A에게 술을 먹이겠다고 공언했던 덕분에 이 실랑이가 사실은 B의 자존심이 걸린 한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어 보였던 한 회식날 드디어 B는 성공한다. 평소 A가 물컵으로 건배를 한다는 점을 이용해 미리 생수병에 소주를 일부 섞어 A에게 따라준 것이다. 의심없이 원샷한 A는 B의 환호성과 함께 몸이 순식간에 빨갛게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술을 마셔버렸다는 당혹스러움에 급히 화장실로 향하다 넘어져 크게 다치기까지 한다. 다음날 B는 겸연쩍게 웃으며 A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모든 일이 다 그런 법이야. 항상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안 어려워. 먹다보면 점점 더 느는게 술이니까 이제부터 잘 배워나가면 되겠네'


맛있는 것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한다 회식이 싫을 뿐



밥 한끼 먹자는 말에 너무 까칠하다


회식에는 여러 포장지가 준비되어 있다. 밥 한끼라는 포장지를 대충 둘러놓고는 받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정말 밥 한끼라면 강요할 필요도 없다. 부하를 생각해서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것이라면, 업무시간에 못다한 얘기를 하고 싶은 거라면 부하가 곤란한 오늘 꼭 하지 않아도 된다. 가벼운 권유니까 거절당했을 때 기분 나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너는 아랫사람이니까 근무시간이 끝나도 당연히 내 말을 들어야 해'라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강요가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선호, 우선순위, 가치관을 남에게 끈질기게 권하고, 설득하고, 깨우치게 만드는 것이 강요다. 목에 칼을 겨누고 회식갈래 말래 물어보는 것만 강요가 아니라 못가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사유를 묻고, 그 사유가 얼마나 정당하지 않은지에 대해 일깨워주고,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나 업무의 연장과 같은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강요다.


종종 이런 망상을 한다. 기업을 세우고 성공해서 수많은 꼰대를 거느린다. 게임을 좋아하니까 회식 대신 밤샘 게임으로 대체한다. 


'요즘 애들하고 어울릴려면 게임 한두타이틀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원래 게임도 회사에서 배우는 것이 좋지.나 사원일 때는 선배들이 맨날 술만 들이부었는데 이젠 진짜 세상 좋아져서 회식 대신 게임을 다하네 참나. 이런 사장 없습니다 여러분'


1차는 가볍게 제일 대중적인 게임을 한다. 나는 딜러 칼픽을 한다. 내 밑으로는 다 지원이다. 픽창에서 머뭇거리는 놈에겐 가차없다. CS 못챙기는 녀석, 킬따이는 녀석들도 고기 못굽는 녀석 타박하듯 헤드셋 너머로 쉴 새 없이 지적한다.

 2차는 자리를 옮겨 총싸움이다. 딜러 칼픽을 한다. 화물도 밀고 딜러도 지키고 상대도 압도하도록 적절히 오더를 내려 상황을 조율한다. 

3차는 스쿼드 생존게임이다. 오늘은 기필코 1등을 할 것이다. 그러자면 협동심을 발휘해야 한다. 내가 죽으면 당연히 팀 결속력이 흔들리므로 바로 리게임이다. 게임이 급박해지다 보니 말도 짧아진다. '김부장 250, 250, 쏴쏴' , '야야야 뒤뒤뒤뒤 뒤봐뒤봐 뒤! 야이씨'.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나니 왠지 전우애도 싹튼 것 같고 단결력도 한층 강해진 것 같다. 터덜터덜 돌아가는 소중한 직원분들의 뒷모습을 보며 다음에도 또 같이 게임 한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좋은 것도 상대에게는 좋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기본 상식이지만 쉽게 잊힌다. 내가 남에게 게임을 권하지 않듯 상대도 나에게 당연한듯 '회식'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회에 속한 이상, 조직에 속한 이상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제 포장지는 다 걷어낸 셈이다. 차라리 그게 낫다. 회식은 원래의 본질인 노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


먹노동의 가치는 인정돼야 한다. 가정주부의 가사노동가치도 수치로 환산되어 나오는 요즘 세상에서 먹노동도 재평가 받아야 한다. 생산성은 딱히 없으니(회식에 생산성이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벌써 미국을 추월했을 거다) 금전가치로 환산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노동'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인정받고 싶다. 시간도 투입되고, 상사 지시도 받고, 감정노동도 들어간다. 노동이 아닌 이유를 찾기 더 힘들다. '회사돈으로 재밌게  놀았잖아'라는 은근한 윗사람의 장단에 맞장구치며 기쁜 마음으로 다음 회식날을 잡기에는 뭔가 억울하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아 '어제는 정말 수고했어'라고 한마디 듣는게 차라리 더 낫다. 분명 어제도 빡세게 먹노동을 한 것 같은데 '어제는 어제고 놀았던 만큼 오늘부터는 다시 더 열심히 일합시다'는 너무 맥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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