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가 아닌 술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했던가 집에서 한두잔 홀짝홀짝하다보니 어느새 술병이 제법 쌓였다. 돈이 이만큼 쌓이면 좋으련만 쌓이는 것은 언제나 쓸모없는 것들 뿐이다.
오랜기간에 걸쳐서 마시다보니 정확한 맛은 솔직히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같은 술을 적어도 2~3병은 마셔봐야 확실한 맛 묘사가 가능하겠지만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하다. 같은 술을 다시 마시기 보다는 항상 다음 새로운 술에 도전해왔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술에 대한 이미지, 느낌적인 느낌, 그리고 술병뿐.
순서는 딱히 없다. 그냥 떠오르는순서대로 작성하였다.
발렌타인 파이니스트
이미 너무 유명해서 굳이 말이 필요없다고, 가성비가 뛰어나다고, 발레타인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명을 생략한다. 그런데 아마 이런 글을 찾아보는 사람이라면 위스키 쪽이 아예 처음일 것이다. 위스키에 처음이라면 가볍게 시작하기에 정말 좋다고 생각한다. 가격 싸고 우리가 '위스키'하면 떠올리는 진한 술맛과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느낌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 점 때문에 발렌타인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 아닐까 싶다. 나도 좋아한다. 다만, 어느 광고에서나 볼법한 '평범한 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술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소주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얼음타서 먹어도 먹을만하고 하이볼만들어서 먹어도 먹을만하고 그냥 마셔도 나쁘지 않다.
발렌타인 30년산
센 척해보고 싶어서 굳이 넣어봤다. 말이 필요없다. 아니, 실제로는 3모금 정도 밖에 마셔보지 못했기에 내가 맛을 평가할 수 없다. 은은한 꿀향이 기억에 남는다. 고급이라는 느낌이 팍팍 난다.
고든 진(Gordon's London dry gin)
진을 처음 마셔봤다. 영화 라운더스(포커 관련 영화)에서 노교수가 혼자 홀짝홀짝 들이키는 걸 보고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향이 엄청 독특하다. 그리고 은은하지 않다. 소나무? 향나무? 나쁘게 말하면 향수나 세제의 독특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취향에 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좋은 숲길을 산책할 때 코로 들이키는 그 향이 술에서 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취향에 맞지 않으면 세제가 덜 닦인 물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첫 잔에서는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맛이 간 두번째 잔부터는 마음에 들었다. 보통 맛없는 술은 얼음에 타서 희석시켜 먹으면 거부감이 줄어드는데 이 술은 되려 얼음에 타 먹으니 향과 물이 따로 놀아서 그런지 거부감이 더 커졌다. 그냥 마시는게 훨씬 좋았다.
발렌타인 마스터즈
맵다. 후추 같이 은은한 매콤하고 향긋한 느낌이 아니라 고춧가루를 팍팍 털어 놓은 것 같다. 자극적이라서 반주로 곁들여도 충분히 맛을 느낄 수 있다. 하이볼, 얼음 둘 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 술 저 술 들이부을 때 오히려 진가를 발휘하지 않을까.
레미마틴 VSOP
위스키와 브랜디, 꼬냑의 차이? 한가지는 확실하다. 브랜디 쪽이 더 비싸다는 것. 그런만큼 확실히 더 맛있다. 평범한 위스키처럼 마시자마자 '크으'소리가 절로 나오게 입과 속을 후끈하게 만들기 보다는 따뜻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든다. 하이볼을 만들어 먹기에는 너무 너무 아깝다. 얼음은 취향에 따라 넣어마셔도 좋다. 다만 너무 많이 희석되지는 않도록 부피가 큰 얼음 하나만 넣는 것을 추천한다. 맛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마셨던 술들 중에서 가장 좋았다.
하치쿠마
단맛이 강하다. 첫 병이 마음에 들어서 두 번 마셨다. 두 병째 마시다보니 단점을 알게 되었다. 단맛이 강하다. 처음에는 캬라멜 비슷한 고급 단맛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두번째 마셔보니 미묘하게 싼티가 좀 난다. 첫번째에는 잘 몰랐던 걸 보니 어지간히 나도 무딘 것 같다. 얼음타서 먹으면 정말 좋다.
커크랜드 스파이스드럼(병 갖다 버림)
맛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양 많고 싸다. 맛은 엄청나게 없다. 고통을 즐긴다면 강력 추천한다.
싸구려 향을 날리기 위해 한달 내내 뚜껑을 열어뒀다가 마셔서 뱃속에 버린 기억이 난다. 콜라에 섞으면 콜라를 버리고 탄산수에 섞으면 탄산수를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는 무시무시한 술이다.
산토리위스키
하이볼에 어울린다. 그냥 마시면 위스키 답지 않은 독특하고 묘한 과일 느낌의 맛이 살짝 난다.
얼음만타서 먹어도 좋지만 토닉워터(특히 깔라만시)를 추가해서 하이볼로 만들면 시원한 맛에 먹기 좋다.
술취해서 미안해
순서는 왼쪽부터 좋은 기억 순이다. 지금에서 와서 생각해보면 왼쪽 두병은 너무 아쉽다. 멀쩡할 때 마셨어야 했는데 기분을 못이기고 그만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오른쪽 두병은 지금에 와서도 별로 다시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럼하고 나는 아예 안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얼음은 다이소 같은 곳에서 구(球)형 얼음틀을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왕 소주보다 비싼 술 마시는 거 조금 더 갖춰서 마시면 좋지 않을까 싶다. 굳이 비싼걸 살 필요는 없다. 잔도 좀 갖추고 싶은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멋진 잔은 너무 쉽게 깨져서 이제는 포기했다. 얼음 넣다가 깨지고 술 따르다 깨지고 잔끼리 부딪혀서 깨지고 설거지하다 깨지고, 술병은 튼튼하니까 차라리 술병을 모아야 겠다.
사실 와인도 다루고 싶었는데 와인은 맛을 기억하기도 쉽지 않고 기껏 외워둬봐야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브랜드별, 연도별) 다른 곳에서 다시 그 와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아 어느 순간 포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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