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스크롤 온라인(스카이림 아님) 리뷰 (1/2)
MMORPG가 고프다
언제나 그렇듯 습관처럼 스팀을 훑어보았다. 엘더스크롤 온라인 무료체험 이벤트가 보였다. 80기가라는 어마어마한 용량에 엘더스크롤이라는 명성에 빌붙는다는 이미지 때문에 선뜻 클릭하기 어려웠다. 딱히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았는데(모드 떡칠, 재미없는 전투, 은신과 원거리 캐릭터의 강력함) 굳이 온라인 게임 형태로 접할 걸 생각하니 설치 전부터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레벨이 됐건 재화가 됐건 뭔가가 쌓이는 게임이 갑자기 하고 싶었다. 요즘 히오스나 문명만 하다보니 계속 초기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는 동안에는 굉장히 재밌지만 엔딩을 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때의 기분은 썩 즐겁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마침 눈의 띈 것이 엘더스크롤 온라인(이하 ESO)이었다.
일단 이 게임은 큰 장벽이 있다. 그것도 두개나 있다. 하나는 언어의 압박, 하나는 핑이다. 다른 RPG 타이틀에 비해 영어 수준이 낮지만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혼자서 퀘스트는 어찌어찌 즐겨가면서 깬다고 해도 온라인 게임인만큼 다른 플레이어와의 상호작용은 영어를 못하면 애로사항이 꽃핀다. 감사하게도 유저의 노력으로 기본적인 한글패치는 됐지만 텍스트 분량이 방대하고 계속 추가되는 만큼 한글패치 진척도가 100%가 될 일은 없다. 영어를모른다면플레이하지않는것이좋다.(2021.6.7. 기준 수정 : 블랙우드 출시 후에도 번역률 84.84%. 대부분 한글 번역 완료. 한국 유저도 많으므로 영어 쓸 일이 별로 많지 않음. 부담없이 일단 깔아보시길...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용량이 왕부담)
아시아 쪽에 서버가 없다보니 핑이 기본 200은 넘는다. PVE할 때는 약간 불편한 수준이거나 거의 느끼지 못하지만 PVP 쪽으로는 스트레스를 좀 받을 것이다. 최고가 돼서 남을 박살내주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플레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서버 운영이 미숙하다거나 서버자체가 불안정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ESO의 문제는 말그대로 서버가 너무 멀리 있어서 지연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VPN을 쓰거나 뭐 이것저것 설정을 바꾼다고 해도 핑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괜한 희망을 가지지 말고 플레이를 아예 포기하는 것이 속 편하다.
여기까지가 독자의 시간낭비를 방지하기 위한 경고다.
그럼에도 이 게임을 즐겨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매 전에 참고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리뷰를 작성한다.
에버퀘스트 뺨을 두 대쯤 쳐주는 방대한 퀘스트
온라인이 아닌 RPG 타이틀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만큼 게임 볼륨이 풍부하다. 온라인 게임이니 만큼 최강, 최고가 되기 위한 노가다 경쟁에 익숙한 김치맨이라면 결국 아이템 파밍으로 빠지겠지만 레벨업하는 과정에서 퀘스트가 주는 즐거움이 굉장하다. 전 대사가 음성지원되기 때문에 외적으로만 봐도 제작사가 얼마나 퀘스트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단순 노가다형 퀘스트가 타 게임에 비해 적다.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은 지역, 왕국, 대륙, 행성으로 점점 스케일을 넓혀 나가는우리의 영웅캐릭터를 쉽게 대접해주지 않는다. 한 왕국의 수호자 타이틀을 획득해도 동네 아낙네도, 주점의 주정뱅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최근 우리 마을 주변에 XXX이 자주 출몰해서 큰일이에요. 둥지를 파괴해주세요.' , '우리 집만의 양조비법으로 술을 만들고 있는데 재료가 다 떨어졌네. OOO를 몇 개 구해와'. 한 두번이면 상관없지만 가는 지역마다 대부분의 퀘스트가 이런 식이다. 달라지는 것은 상대하는 몬스터의 종류 뿐이다. 그나마도 '불타는', '광포한', '잿빛', '얼어붙은' 등의 수식어로만 간신히 구분이 가능한 수준이라 그마저도 별볼일 없다.
퀘스트라는 것이 단순 레벨업 노가다를 지양하고 게임 플레이의 깊이를 더하기 위함이건만 어느새 퀘스트도 노가다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ESO의 경우 대부분의 퀘스트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간단한 퀘스트 조차도 유머가 있다든지 반전이 있다든지 나름의 재미를 준다.
퀘스트로 시작해서 게임이 끝날때까지 퀘스트가 마르지 않는다는 에버퀘스트처럼 ESO도 퀘스트 천국이다. 플레이어가 게임 세계에 몰입할 수 있도록 단순 튜토리얼이나 시스템 안내 조차도 퀘스트로 풀어낸다. 튜토리얼부터가 메인퀘스트의 시작이다. 시리즈의 전통(?)을 이어ESO도 감옥에서 탈출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플레이어는 이야기 흐름에 따라 메인퀘스트로 바로 뛰어들어 초반에 끝을 볼 수도 있고 메인퀘스트는 미뤄두고 흥미가 가는 지역퀘스트, 길드퀘스트, 팩션퀘스트, 일일퀘스트 등을 수행할 수 있다. 안해도 될만한 퀘스트는 적당히 쳐내지 않으면 퀘스트에 파묻혀 해야할 것을 못할 정도로 많은 퀘스트가 있으므로 단순 노가다에 지친 플레이어라면 관심을 가져볼만 하다. 굳이 DLC나 확장팩을 구입하지 않더라도 본편만으로도 상당한 볼륨을 자랑한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의외로 괜찮은 레벨 스케일 시스템
ESO는 'one Tamriel' 업데이트 이후로 레벨스케일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즉, 자기 레벨이 몇이건 관계없이 어느 지역을 가도 자기 레벨에 맞춘 상대가 나온다. 기존 대다수의 MMORPG는 A라는 지역에서 성장하다가 너무 쉬워지면 B지역으로 가고 C지역으로 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면 ESO는 어느 지역을 가든 적당한 상대가 나오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흥미를 느끼는 지역부터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실 ESO를 접하기 전에는 레벨 스케일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내 레벨이 오르는 만큼 상대하는 몬스터의 레벨도 올라가기 때문에 캐릭터 성장과 그에 따른 빠워업의 체감이 중요한 RPG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키우는 보람은 커녕 자기 레벨에 어울리는 장비를 갖추지 못할 경우 레벨업을 할수록 오히려 자신의 캐릭터가 약해지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처음엔 거부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WOW와 ESO를 비교하다보니 레벨스케일 시스템의 장점이 확 와닿았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특성상 함께 플레이(꼭 '함께' 플레이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서성이는 사람까지 포함해서)하는 유저 수가 굉장히 중요한데 사실 WOW는 신규유저가 만렙을 찍고 메인콘텐츠를 즐기지 않는 한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다. 고인물은 어디선가 레이드를 하건, 템파밍을 하건 엔드 콘텐츠에 몽땅 몰려가 있고 공들여 만들어 뒀던 저렙 구간은 버려지기 때문이다.
ESO에서는 어딜 가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레벨스케일 덕분에 버려지는 저렙구간이라는 개념이 희미하기(아예 없지는 않다) 때문에 필드에 구멍만 파둔 퍼블릭 던전, 도시, 인던, 제작 스테이션 등 뭔가 할일이 있는 곳에는 삐까뻔쩍한 고렙부터 헐벗은 저렙까지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적막한 온라인 게임에 몸서리 치다 와서인지 몰라도 괜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듀얼도 신청해보고 말도걸게 되는 분위기다. 90년말 2000년 초반 온라인 게임의 감성을 맛볼 수 있었다.
친구와 함께 할 때도 좋다. 새로 키우는 친구를 배려해서 부캐를 키우거나 할 필요없이 본캐로도 충분히 같이 즐길 수 있고 부캐를 생성해서 함께 키우다가 레벨차이가 벌어져도 큰 문제가 없다. 물론 ESO도 아이템과 스킬을 갖춘 고렙 캐릭이 더 강력해서 버스를 태워준다거나 캐리해줄 수는 있지만 다른 게임처럼 고렙이 극단적으로 강하지는 않기 때문에 버스를 탄다 하더라도 '함께' 플레이한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대다수의 MMORPG에서 20레벨과 100레벨이 함께 파티를 맺는다든가 함께 필드를 휩쓸어버리는 일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ESO에서는 충분히 즐거운 플레이가 될 수 있다.
지긋지긋한 파워인플레이션 탈출
소년 만화는 언제 재미가 없어질까. 주인공의 파워가 일정선을 넘으면서부터 만화의 흥미는 급격히 떨어진다. 독자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지금까지 헤쳐왔던 모험, 이야기, 세계관, 설정 등이 모두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엉망이 된 이후부터는 '강함'에만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 구조도 단순해지고 반복적으로 흐르게 된다. 단적인 예로 '니가 해치운 녀석은 우리 단체에서 고작 10위에 불과해, 곧 9위인 내가 나서지' 라는 식의 전개가 반복된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파워 인플레이션이 크면 클수록 저렙은 자신의 현재 모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서 재미가 없다. 고렙도 힘의 차이가 너무 극명하다보니 마땅한 경쟁상대도 없는데다가 즐길 콘텐츠도 성장 일변도로 치닫기 때문에 결국 지치게 된다. 저렙 때는 쥐 한마리 잡는다고 데미지 10씩 주면서 고생하는데 고렙들은 수억씩 데미지를 주는 상황에서는 성장 말고 다른 재미는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숫자놀음에 불과한 만렙 확장, 더 강한 아이템, 레벨과 다를 바 없는 강화시스템과 같은 종적 콘텐츠 밖에 남지 않는다. 어제까지는 1억 데미지를 주는 아이템이 최고 였는데 확장팩이 업데이트되고 나서는 1억은 쓰레기가 되고 10억 데미지 정도는 줄 수 있어야 게임의 엔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수준이 된다는 말이다.
반면 ESO에서는 파워인플레이션을 적정 수준에서 잘 관리하고 있는 덕분에 성장 일변도의 종적 콘텐츠 보다는 횡적인 콘텐츠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DLC나 확장팩이 출시 될 때마다 플레이어가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단순 무식하게 숫자로만 떼우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스킬라인이 추가된다거나 다른 강함을 추구하는 아이템이 추가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플레이어도 싱글플레이 게임처럼 자연스럽게 스토리나 부가적인 요소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RPG를 표방하고 있는 이상 긍정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 ESO에서는 성장이나 강해진다는 개념이 없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챔피언 포인트, 아이템, 스킬라인, 빌드 등을 통해 남과 차별화해서 강해질 수 있다. 다만 그 차이가 다른 게임처럼 극단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앞서말했듯이 누구는 쥐한마리 잡겠다고 고생하는데 누구는 지옥의 대괴수 여러 무리를 학살하는 격차가 없다. 이런 게임에서는 힘의 간극이 굉장히 크고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비슷한 상대와 하는 PVP를 즐길 기회가 많지 않다. 하지만 ESO에서는 컨트롤 여하에 따라 3:1, 4:1도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기도 하지만 힘의 차이가 극단적이지 않기 때문에 3명이 안되면 4명, 5명을 불러서 싸우면 되므로 저렙이나 라이트 유저도 충분히 모든 콘텐츠를 즐길 기회가 있다.
1부에서는 게임의 큰 컨셉만 다뤘다. 양산형 MMORPG에 너무 많이 데여서 트라우마까지 겪었을지도 모를 독자를 위해 시간 낭비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리뷰를 작성했다. 여기까지 읽고도 여전히 ESO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게임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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