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7일차
퇴사 준비생의 혓바닥은 길다
그냥 쿨하게 그만둬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목표일을 정하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포스팅 제목이 퇴사일 D-00 이 아니라 준비 00일차인 이유다. 목표는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어갔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에는 홧김에 당장 다음날!을 외쳤다. 아 그런데 저번달에 열받는다고 지른 물건이 할부가 남았네.
할부가 끝나는 10월이다!. 아 그런데 세상에 빚진거 없이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빚이 조금 있었네. 일종의 회사를 통한 대출인지라 퇴사와 동시에 바로 상환해야 하는데 10년에 걸쳐 갚으면 작은 돈이지만 당장 다음달에 모두 갚으라고 하면 부담스러운 금액인지라 또 다시 일정은 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조기상환이 가능한 12월이다!. 아 그런데 조금만 있으면 연차가 새로 발생한다. 아 그런데 조금만 있으면 설이다. 아 그런데 조금만 있으면, 아 그런데 아 그런데
회사를 나가면 안되는 이유, 다녀야하는 이유는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그래서 현재는 12월 말을 잠정 목표로 정하고 이후는 상황을 보기로 했다.
단지 목표일정만 늦췄을 뿐인데 퇴사 준비로 마음을 편히 하면서도 현실문제에도 잘 대응하는 듯한 묘수를 발견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가자니 겁나고 머무르자니 갑갑한 상황이다. 나가면 뭐먹고 살지. 뭘해야 할까. 잘 해낼 수 있을까. 도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주변에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본격적으로 마음먹기 전에 이것저것 사전조사를 할 때부터 나를 괴롭혔던 질문들이다. 괴로운 고민을 안하는 방법은 그냥 회사를 다니면 되는건데 이 쪽에 더 큰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퇴사 관련 글들을 보면 다들 이름만 대면 알법한 회사에서 삐까뻔쩍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작가도 되고 강연도 나가고 퇴사 후에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한다. 공개글을 쓰면서 뭐 미주알 고주알 쓰겠냐마는 대부분 단순한 직장에서의 괴로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한발짝 내딛는 느낌의 퇴사가 많았다. 야망을 품은 퇴사라. 내가 하고자 하는 퇴사하고는 결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름만 대면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대표상품을 얘기하면 거의 다 아는 그런 회사의 자회사에서 분점형태로 떨어져 나온 곳에 출근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냥 중소기업 사무실에 다니고 있다.
잘나가는 사람들은 '어디 다닙니다.' '뭐 합니다.' 이런 식으로 짧게 짧게 말하던데 내 경우에는 현황 설명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만 두게 되면 저것보다도 더 장황해질테니 걱정이 또 하나 늘어난다.
직장에서의 괴로움을 사례로 들어 말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그런 개별 사례는 사실 생계라는 고민 앞에서는 부질없다. 그리고 별로 공감도 안간다. 남들 회사 힘든 일 들을 때면 내 반응도 똑같다. 어차피 급여에 다 포함된거니까 참으라고. 쉽게 말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고.
기분 나쁜 일, 싫은 일, 꼴보기 싫은 일은 항상 일어났다. 예전 직장에서도 그랬고 전전 직장에서도 그랬고 또 직장을 다니기 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더 이상 이겨낼 투쟁심이 솟아나오질 않는다. 아니 버텨낼 의지도 바닥을 드러내버렸다. 더러운 꼴 있어도 술 한잔, 안되면 두잔, 안되면 한병 마시고 어쨌든 넘겨냈던 일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잘 넘어가지를 않는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한다고 해서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데 왜 솔잎이 잘 넘어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사회는 누구 채찍이 더 잘 듣는 채찍인지 겨루는 곳인가보다. 기운 없는 나를 한번씩 쳐대면 순간 꿈틀하게 마련이라 반사적으로 일을 이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냥 두면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으니까 계속 더 자주 쳐댄다. 이 채찍이 아닌가. 저 채찍은 아닌가. 이 사람 저 사람 채찍질을 해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성이 생겨서 견딜만 해지면 좋으련만 이제는 견딘다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싫다. 그렇다고 열심히 할 마음도 없다. 꾸역꾸역 먹고 있던게 솔잎인줄 알았는데 솔잎이 아닌건지 송충이가 아니라 지렁이었던건지 모르겠다.
힘내라는 말에 힘 빠지니까
예전에는 너무 쉽게 힘내, 기운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스스로에게도 많이 했고 남에게도 많이 했다.
포기할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지금의 위기를 이겨내자.
죽을 힘을 다하면 못할 것이 없다.
당연하게도 못하는 것은 너무 많고, 뭔가를 계속 해나가는 것이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걸 애써 무시했던 것 같다. 이제는 누군가 던져주는 한마디 덕담도 힘겨울 만큼 지쳐버린 느낌이 는다.
몇년 뒤를 걱정하면서 망설이기에는 당장 내일이 더 걱정되니까 하는
그런 퇴사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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