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을 떠나려는 이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법. 그렇다고해서 떠나려는 중 탓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 절간이 싫은 이유도 한번 말해보고 싶다.

 

일단은 통근 시간이 생각보다 큰 부담이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의 출근은 가볍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사무실 위계 역순으로 출근하고 순서대로 퇴근하는 아름다운 사무실 분위기와 맞물려 출퇴근 과정 자체가 큰 고통을 준다. 서울 직장으로 옮긴 내 탓, 서울로 이사를 못 간 내 탓, 굳세지 못한 내 탓 아 이거 참 또 중 탓을 하게 된다. 아침 버스에 몸을 실으면 옆에 누구라도 타게 되면 몸에 상당한 부담이 간다. 몸집이 상대적으로 왜소한 여자가 타도 닿을까 긴장하게 돼서 움츠러 들고 몸집이 큰 아저씨가 타면 뭉개지는 수밖에 없다. 버스는 한시간을 타지만 버스를 타기까지 거리가 있고 내려서도 회사까지 거리가 있어서 이래저래하면 1시간 30분은 생각을 해야 한다. 특히 퇴근의 경우에는 서울에서 차라도 막히는 날에는 욕이 입밖으로 절로 나온다. 처음 반년은 새벽 5시 30분 기상 오후 10시 취침 생활을 이어갔다. 집에 도착하면 저녁 7시인데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술만 들이킬 뿐. 그래도 생활이 조금 익숙해지고 최적화 루트를 찾으면서 기상시간도 6시가 되고 저녁에도 어떻게든 의지와 체력을 짜내서 일정을 소화하고는 있다. 정신력을 뒷받침하는 건 체력이라는데 체력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경직된 사무실 문화가 정신력을 갉아 먹는다. 사무실이 웃고 떠드는 사교의 장이 될 필요도 없고 그런걸 즐기는 타입도 아니지만 반대로 내가 일하는 곳인데 사무실 공기가 불편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데 사무실은 항상 과긴장 상태다. 업무전화도 소근소근. 발소리도 숨소리도 내기에 조심스럽다. 이유는 명확하다. 작은 사무실은 위계에 따라 쭈욱 늘어선 10명 남짓한 인원으로 채워져 있다. 사무실의 장은 이 작은 사무실에서 모시기에는 너무나 높은 분이다. 장이 너무 독보적으로 높다보니 완충지대가 들어설 곳이 없다. 모두가 '그 분'의 심기 경호를 위해 모시기 경쟁을 치열하게 벌일 뿐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다보니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기준점이 높아지고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은 증폭되어 아래로아래로 압박이 더 해진다. 말하는 입장에서도 마음 편히 필터링없이 압박을 가한다. 

 

 

나는 괜찮은데 그 분이 싫어하실거니까 똑바로 해


계속 해오던 경력을 살려서 이직을 한 지 기간이 꽤나 지났건만 아직도 업무가 손에 익질 않고 다음날 무슨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사무실에서 수십년 일한 사람도 마찬가지 불안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최근 깨달았다. 나를 향한 강한 압박은 자신의 불안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아랫사람으로서 대쪽같이 굴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도 안되지만 그래도 말이나 한 번 꺼내볼 수 있는 일도 여기서는 어렵다. 그 분이 싫어하실지도 모르니까.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상태가 안 좋아서 연차를 쓰면 프로답지 못한 죄인이 된다. 그래서 아파도 억지로 사무실에 출근하면 몸이 아픈 역적이 된다. 업무 일정은 변덕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보고서 방향도 마찬가지. 어디서 뭔가를 듣고오면 다음날 일이 생긴다.  아무도 변명 내지는 사유같은 것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다. 그저 스스로를 다그치듯 긴장한 어깨에서 터져나오는 넵! 소리만 울려퍼질 뿐이다. 다음날은 또 어떤 넵!이 들려올지 두렵다.

 

 

직무에 대한 만족도는 높은데 하는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의는 있었는데 이상하게 실제 업무로만 들어서면 의욕이 살지 않고 영 내키지가 않아 괴로웠다. 이유를 몰랐다. 상사의 변덕, 간섭 등등 뭐 어디나 흔히 있는 일들 때문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넘겼다. 직장인이라면 어차피 돈 받으면서 남일 해주는 건데 내 기획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뭐 어떠리.하며 스스로 다독였는데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 놈 돌쇠야!!!!

 

 

대감님 불호령이 떨어진다. 상사와 부하직원이 아니라 양반과 머슴이 있을 뿐이다. 사소한 일로 질책을 크게 받은 일이 있었다. 물론 나같은 상것에게 직접 말한 것도 아니고 마름을 통해서다. 정말 어디가서 말하기도 낯부끄러울 정도로 업무와는 무관한 사소한 일이었다. 예를 드면 회식자리에서 건배할 때 잔을 높이 들어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다. 핀잔 정도로 끝날 일일 수도 있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식으로 나에 대한 비난에서 시작해서 아랫사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준엄하고 점잖은 꾸짖음이 마름에게까지 닿는다. 유능한 부하직원이 필요한게 아니라 머슴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밀려온 감정은 사실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다. 자괴감 한스푼, 굴욕감 두스푼, 분노 한꼬집 정도였나.

 

업무 성과나 결과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업무는 그저 그분의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자신의 존귀함을 드높이고 주변의 천박함을 드러내는 장치일뿐이다. 비비드한 파스텔 휘두르는 이유다. A는 A라서 지적하고 B는 B라서 지적하면 된다. 

 

머슴이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 머슴이 뭘 알겠어. 머슴이 그럼 그렇지. 머슴 주제에 좀 한들 그게 뭐?

 

그간의 업무에 대한 간섭, 지적, 변경 등이 업무지시나 피드백으로 느껴지지 않고 근원적인 거부감이 느껴졌던 이유가, 업무에 의욕이 살지 않았던 이유가 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결코 맞출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업무가 아닌 나를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도 못맞추면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건지 원

 

 

천하제일 ㅈㅅ대회 같은 곳에 나올법한 임팩트 넘치는 사건사고는 없다. 하지만 역시나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준비기간 동안 할 내탓남탓은 이제 다 해버린 것 같다. 이제는 정말 레알 찐 준비다.

 

아 그전에 발더스게이트3도 좀 다시 깔고 문명7 트레일러도 좀 보고....

반응형

'퇴사는 현실이니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준비 264일차  (1) 2025.05.03
준비 82일차(돈만 있으면 된다)  (0) 2024.11.02
준비 42일차(퇴사는 메타인지 역순?)  (0) 2024.09.23
준비 7일차  (2) 2024.08.19
준비 1일차  (1) 2024.08.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