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었다. 길었다. 언제까지고 나를 괴롭힐 것 같았던 여름처럼 내가 처한 상황도 계속해서 나빠질 것 같았는데 다행히 이제는 멈춤 상태인 것 같다. 폭풍 전야인지 반등의 시작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더 이상의 상황은 없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다만 갑자기 온 가을처럼 상황이 급 호전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아쉽다. 그렇다. 여전히 어렵고 힘든 상황이다. 다만 더 이상 힘들어지지는 않을 뿐.

 

퇴직 준비를 하면서 내 현황에 대해서도 잘 따져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소비성향, 재산상태, 대체 생계 수단 등등 내가 생각한 것보다 체감상 5할 이상은 부족하거나 과다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빚부터 갚는 것이 1순위다. 쉴 때 쉬더라도 남의 돈으로 쉬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직장생활 말고는 한 일이 없는 사람이 갑자기 하늘에서 돈이 떨어져서 빚을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꼼짝없이 근로를 계속해야하는 사유가 발생한 것이다. 

 

내년 3월. 아무리 요리빼고 조리빼봐도 3월이다. 한여름 내내 나를 괴롭힌 난제다. 아니 답도 알고 있고 풀이 과정도 알고 있으니 난제는 아니다. 큰 문제다. 원래 스케쥴 대로라면 당장 다음주면 퇴직이건만 지금와서 보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빚만 갚으면 될까. 진짜 난제가 있다. 홧김이 아니라 실제로 퇴사 계획을 세워보니 내가 여태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아마 모든 퇴사러들이 겪은 문제 아닐까 싶다.

 

인생 제2막을 든든하게 책임져줄 생계 수단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들이 내 블로그만큼이나 허술했을 줄이야. 

 

퇴사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블로그를 처음 개설할 때가 생각났다. 블로그 포스팅을 처음 작성했을 때만 해도 꿈이 있었다. 1년에 풀프라이스 게임하나 살만한 수익만 거둬도 성공한 게이머 아닐까라고. 수익은 커녕 처음 구글 광고를 다는 일 조차 버거웠다. 그리고 최종 성과는 보다시피 이정도다.

 

취미는 취미라서 할만한 것일 뿐 생계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으면서도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했나 보다. 모자란 실력만큼(노동력) 돈(자본)이라도 더 때려박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준비 안된 퇴사준비생은 괴롭기만 하다.

 

앞선 빚 문제는 말했다시피 시기도 명확하게 계산이 되어서 나오는데 이 부분은 그야말로 난제다. 실력과 돈을 얼마큼 언제까지 쌓아야하는지 예측할 수가 없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욕구가 더 많은 존재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거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별로 바라는 거 없어~ 아무거나 줘'

'나는 별로 바라는 거 없어~ 아무거나 골라'

'나는 별로 바라는 거 없어~ 아무거나 시켜'

 

특별히 자기가 뭘 바라는지 생각을 안해본 것 뿐이지 실제로 바라는 것이 없는게 아니다. 아무거나 시키라고 해서 그대로 했다가 피 본 케이스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이 그 증거다. 

 

나는 취향이 명확하고 내가 얼마큼 바라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아무거나'를 말하는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무더운 여름이 나를 일깨워줬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는 바라는 것이 많았다.

 

'삼시 세끼 밥만 안 굶고 살면 좋겠다'는 안빈낙도의 자세를 견지해나갈 자신이 있고 또 그런 삶의 방식에 거부감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더위에 에어컨 없이 살 수 있을까. 에어컨을 잠시 꺼보았다. 금방이라도 더워 죽을 것 같다. 에어컨은 돈이 든다.

평소에 걷는 것을 즐겨 지하철 2~3정거장 쯤은 그냥 걸어 다녔다. 등딱지가 갈라질 것 같은 햇살에 결국 버스에 오르는 나. 결국 빙수라도 하나 사먹는 나.

 

좋아하는 걸 안하고 참기만 하면 될줄 알았다. 그런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참아내야만 한다. 인내하지 못하면 돈이 든다. 

 

삼시 세끼는 돈이 안드나. 하루 한끼만 먹어도 사람은 살 수 있다. 그런 각오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만한 각오는 없었다. 오히려 '삼시 세끼 고기반찬, 채소반찬, 국, 밥, 파스타, 피자, 가끔은 야식 등등등 먹고 살면 좋겠다'는 지극히 당연한 바람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과연 이런 것들을 포기하고 살 수 있을까. 예전 대답은 두말할 것 없이 '예스' 였는데 퇴직을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니 오히려 확신은 없어져 버렸다.

 

계획을 세우다 보니 정리됐다고 생각 한 것들이 오히려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막연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실소가 터져나올 정도다.

 

절약과 포기. 잡생각을 하며 오늘도 좁은 버스에 몸을 밀어 넣어보았다. 그래도 출퇴근을 안하면 버스비는 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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