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나 버린 이성 중추(그런게 있다면..)

 

2024년 12월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정령섬 확장팩을 선주문 했기 때문이다. 토큰팩은 간신히 참아냈다.

무더위, 피로, 장마, 눅눅함, 번잡함, 고민, 분노, 우울, 무료, 실망 등등 온갖 좋지 못한 것들로 점철된 7월이었다. 이대로 7월의 마무리를 지었다가는 정말 2024년 여름이 최악의 여름이 될 것만 같아서 갑자기 여름 휴가를 떠났다.

 

그렇지만 실제로 떠날 곳은 없었다. 집이 최고다. 하루이틀은 그냥 끝간데없이 마시고 달리고 잤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보니 다들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아딱', '아딱' '아딱' '아딱', '아딱'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딱은 아컴호러 카드게임을 일컫는 말이다. 카드게임이라서 딱지 그래서 아딱이다. 본격 보드게임에 입문할 때 3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정령섬, 메이지나이트, 아딱. 코즈믹 호러라든지 크툴루라든지 그런 세계관을 너무도 좋아했지만 아딱 자체는 게임으로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매체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데 '굳이?' 싶은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드게임하면 컴포를 만지작 거리며 여러 사람과 하하호호 웃으며 즐기는 나를 상상했기 때문에 더더욱이 보드게임이 아닌 카드게임 느낌이 더 강한 아딱은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세계관도 아무래도 접근이 쉽지 않다는 점도 고려했다.

 

정령섬과 메나 후회없는 선택지였다. 그렇게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12월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빈공간을 갑자기 치고들어온 것이다. '아딱''아딱''아딱'

 

입문용 세트로 가장 추천받는 코어(개정판) + 던위치의유산확장팩 조합으로 바로 질렀다. 코어게임만 사려고 했는데 다들 던위치도 꼭 같이 사라고 해서 샀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는 품절이다. 역시 보드게임은 있을 때 안사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드디어 왔다, 그리고 약간의 실망

 

카드게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샀음에도 패키지를 확인하고서 실망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드만 있다. 다시 보니 약간의 토큰이 있다. 카드 품질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카드게임임에도.

 

정령섬과 메나는 카드 슬리브를 끼우지 않았다. 카드 고유의 손맛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비닐의 미끌거리는 감촉이나 부피감이 커지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딱 카드는 정말 찢으면 찢을 수 있을 것 같은 종이 느낌이 물씬 나는 카드라서 슬리브없이 플레이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카드를 구부려보아도 반발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냥 곧바로 접힐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가격을 중요시하는 보겜러는 많지 않겠지만 아딱의 경우에는 구매할 때 슬리브 비용까지 고려해야한다는 점을 미리 짚고 넘어간다. 

 

여기서 1차 선택지가 떴다. 개봉 노플로 중고로 팔 것인가 일단 속행할 것인가. 휴가만 아니었다면 중고행이었을 것 같다. 두툼한 가이드북과 카드에 적힌 빼곡한 텍스트를 보니 메나에서의 괴로움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드나 좀 만지작 거리고 룰북좀 읽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메나와 정령섬으로 다져진 터라 게임 자체는 이제 충분히 진행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런 게임은 에러플이 필수다. 애매한 경우에는 룰북 뒤적이느라 텐션 떨어트리지 말고 그냥 자기한테 불리한대로 해석하면 게임은 어떻게든 굴러간다. 그리고 후에 룰의 정확한 적용례를 확인하는 것도 재미다. 정답맞추기가 아니기 때문에 꼭 완벽하게 플레이 할 필요는 없다. 혹시나 그럴일은 없겠지만 여러사람과 게임할때는 더더욱 룰북 뒤적이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다짐해왔던 터라 룰북 공부는 그쯤 해두었다. 이제 실제 플레이를 할까말까 망설이던 오후7시였다.

 

'1인 2조사자 필수', '풀확장팩 갖추고 할 거 아니면 하지마셈', '잔룰 너무 많아 어려움', '딱지류 안좋아하면 하지말아라'

 

등등 갈등의 추가 점점 부정적으로 기울려던 참이었다.

 

한판 안 돌려봐?

 

그때 들려오던 목소리. 크툴루로부터의 전언이었을까? 지금도 알 수 없다. 원래 그렇게까지 보드게임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였던 터라 이런 고웨이트 전략 하드코어 엑스퍼트 전문가 게임은 당연히 1인플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의외였다. 

 

게임 스타트.

 

 

아딱은 큰 캠페인 아래 작은 시나리오들이 포함되어 있는 구조다. 코어에는 광신도의 밤이라는 캠페인이 있고 그 안에 3개의 시나리오가 포함되어 있다. 첫번째 시나리오를 펼쳐보았다.

 

처음이었던 터라 세팅에는 좀 애를 먹었지만 첫번째 시나리오는 튜토리얼 같은 것이라서 안내서에 적혀있는대로만 하면 크게 무리는 없었다. 덱 구성도 정말 머리가 아플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임 패키지를 뜯으면 일단은 초보자를 위한 덱구성이 되어 있어서 그대로 플레이를 하면 된다. 혹시나 카드를 섞어놨다고 하더라도 안내서 뒤편에 초보자용덱이 명시되어 있으니까 그대로 따라서 구성하면 된다.

 

이 초보자용 덱에 대해서는 사람들 말이 아주 많은데 대부분의 의견은 전혀 들어볼만한 가치가 없다. 요지는 초보자덱이 아주 구리기 때문에 덱을 새로 구성해야하고, 코어에는 구린 카드밖에 없으니까 확장팩을 다 갖춰서 거기에 있는 카드들을 가지고 와서 최고 최강의 덱을 갖춰야 한다는 그런 의견이다. 틀린말은 아닌데 적절한 의견은 아니다. 이런 의견에 휘둘려서 게임 플레이도 해보기 전에, 아직 초보조차 되지도 못한 시점에 벌써부터 세계1위를 노릴 필요는 없고 그냥 게임을 즐겨보면 된다.

 

시나리오는 주요사건과 주요목적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진행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주요사건은 안좋은 흐름이고 주요목적은 좋은 흐름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주요사건이 진행되기 전에 주요목적을 달성해나가면 된다.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던 점은 일반적으로 '패배' 내지는 '게임 끝'으로 마감될 법한 상황에서도 게임은 끝나지 않고 그 나름의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안좋으면 안좋은대로 잘했으면 잘한대로 거기에 맞는 결말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첫시도에서는 당연히 게임이 터저버렸는데도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갈 수 있어서 몰입이 더 쉬웠다. 만약 그대로 게임 패배 내지는 게임 끝이었다면 허무했을텐데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이야기는 또 뭐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게임을 쉽게 정리할 수 없었다.

 

온갖 에러플이 난무하고 혼돈토큰(일종의 주사위) 억까가 난무했던 폭풍같은 밤이었다. 캠페인의 마지막인 시나리오 3을 앞두고 게임 세이브(테이블 정리를 하지 않음)

 

아침이 밝아왔다

 

스포주의!!!!!!!! 아래 사진의 카드들을 굳이 자세히 볼필요는 없습니다

 

 

 

플레이가 뭔지 소유가 뭔지 조종이 뭔지 뭐가 좋은 카드인지 게임을 하다보면 뭔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기분이다. 룰북에 써있는대로 '무자비한 규칙'(애매하면 플레이어에게 불리한 쪽으로 해석)을 적용해가면서 플레이하니 오히려 쾌적한 플레이가 가능했다. 찜찜함 따위는 없고 시시각각 조여오는 시나리오의 압박과 몰려오는 적으로 인한 긴장감만이 있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내 캐릭터가 어떤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작게는 혼돈토큰의 결과값이 궁금하다. 

 

아딱은 자신의 덱은 치밀하게 사전에 구성할 수 있지만 일단 게임에 들어가면 혼돈토큰에 의해 플레이 예상이 완전히 뒤집어 질 수 있다. 플레이어는 주요 행동마다 의지, 지식, 힘, 민첩 테스트를 해야하는데 자신의 기본 능력치와 덱을 통해 얻은 능력치를 합하고 혼돈토큰 결과값을 적용한 다음에 앞서 말한 테스트값과 비교해서 성공여부를 가린다. 능력치가 아무리 낮아도 말도 안되는 행운으로 행동을 성공할 수도 있지만 반대도 성립하기 때문에 그 긴장감과 재미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 

 

혼돈토큰을 탓할 것도 없이 게임은 결국 터져버렸다. 이때쯤이었다. 개봉을 미뤄두었던 던위치의 유산 확장팩에 개별포장되어있던 신화팩을 개봉했다. 그 안에 시나리오카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활용 가능한 플레이카드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조사자를 바꾸고 자연스럽게 초보자 덱이 아닌 나만의 덱을 구성했다. 게임 한판 일단 굴려보면 느낌이 온다. 갑자기 사람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기왕 살거면 풀확 갖추고 플레이하는게 좋음', '게임에 재미붙였는데 확장팩 빠지면 후회하게 되어 있음' 등등 

 

아 역시 사람들 말을 들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토탈워 워해머 확장팩도 몇개 이는 빠져있지만 아주 재밌게 잘 즐기고 있다. 확장팩 하나씩 모으는 재미도 있을 것 같지만 또 생각해보니 보드게임은 아예 다시 생산이 안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영영 구할 수 없다고 하면 아쉬울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뭔가다. 머리속의 복잡한 생각은 뒤로 하고 일단은 그냥 현재 게임이나 제대로 즐겨보자고 생각했다.

 

로랜드와 웬디 조합에서 조이와 데이지로 조합을 바꿨다. 조이는 적들을 물리치는 데 특화된 조사자고 데이지 워커는 시나리오의 주요목적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모으는 데 특화된 조사자다. 물론 단서만 모으는 것은 아니고 약한 적 정도는 처리하거나 너무 강한 적과 만났을 경우에는 몸하나 빼내는 능력은 갖추고 있다.

 

첫번째 트라이에서는 단서를 잔뜩 들고 있는 채로 음모가 가득찬 장소에서 죽어버리는 바람에 게임이 터져버렸다. 가뜩이나 조이는 단서를 캐기가 어려운데 장소에 걸려있는 함정카드 때문에 내가 거기에 떨궈둔 단서를 캘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번 초보자덱과 조사자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시나리오 1부터 막혀버리니 당황스러웠다. 아직 조사자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랬거니하면서 2트를 시작했다. 2트에서는 다행히 시나리오3까지는 밀고 갈 수 있었다. 초보자 덱으로는 절대로 깰 수 없었을 것 같은 절망감이 우리를 휘감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결국 혼돈토큰이 장난질을 쳤다. 최종보스가 나오기 전 좀 강한 적이 앞길을 막아섰는데 행동을 아끼고 빨리해치우고 싶은 마음에 경솔했다. 다른 조사자와 교전 중인 적을 공격했다가 실패하면 그 공격이 다른 조사자를 공격한다는 룰이 있는데 거기에 발목히 잡힌 것이다. 2연속 대실패 혼돈토큰을 뽑아 버린 것이다. 결과는...

 

 

 

단도하나 들고 힘겹게 적과 맞서 싸우던 조이의 뒤통수를 쎄게 2대 정도 책으로 내려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런 플레이어를 위해서도 결말은 준비되어 있다. 이런 말도 안되는 결과를 낳는 혼돈토큰에 나쁜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뽑는 손맛이 정말 일품이다. 혼돈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와 뺄 때 정말 재밌다. 재미를 배가시키기 위해 코인 캡슐도 구매했다. 짤그락 거리는 소리와 촉감이 재미를 더해준다. 25mm면 혼돈토큰에 딱맞아서 덜그럭 거리지 않고 딱 좋다.

 

이후 하루종일 계속해서 덱을 구성하고 업그레이드하고 별용을 써봐도 결국 클리어할 수는 없었다.

 

게임의 매력에 빠져서 계속 진행할수록 에러플은 줄어들기 시작하고 덱구성은 좀 더 효율적으로 변해가고 행동도 더 전략적으로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게임이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선택지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게임이 끝나도 다음 시도를 할 때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하다. 이번에는 어떤 덱구성을 해볼지 어떻게 게임을 풀어나갈지 집중하게 된다.

 

 

여름휴가 종료

 

여름휴가 종료를 하루 앞두고 결국엔 광신도의 밤 캠페인을 클리어했다. 한턴을 남기고 겨우 주요목적을 성공했을 때 터져나왔던 웃음과 함성이 기억에 남는다. 갑자기 깨졌으면 허무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천신만고 끝의 클리어다. 굉장히 쉽게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우리는 정의로운 조사자들이라며 계속 밀고 나갔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사실 초보자 덱을 할때는 쉬운 선택지를 선택해서 그 결말은 이미 확인을 했다.)

 

여세를 몰아 다음 캠페인도 시작했다. 비록 우리 조사자들이 충격적인 사건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저번 캠패인에서의 경험이 많이 쌓여있던 터라 나름 수월하게 게임을 진행시켜 나갈 수 있었다. 하하호호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밤이다. 이제는 자야할 시간이다. 아 그런데 마지막에 깼던 시나리오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에러플을 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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