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면 생각나네 잘그락 잘그락

 

혼돈 토큰을 혼돈 주머니에서 뽑아내는 맛이 일품이다. 혼돈 토큰은 이 게임의 알파이자 오메가 아닐까 싶다. 장고의 장고의 장고 끝에 묘수를 찾아내고 행동에 옮겼는데 그 결과는 혼돈 토큰에 달려 있다. 진인사 대천명. 혼돈의 뜻을 기다릴 뿐이다.

 

운빨이 크게 작용하는 게임인지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거라고 생각한다. 게임을 하면할수록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 난이도가 어려워지자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오는 구간도 있었다. 효율적인 덱구성을 몰라서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아 혼돈의 먹잇감이 될 때다. 

 

저번 리뷰를 쓰는 동안에는 첫 캠페인인 광신도의 밤까지만 진행했던 터라 어떻게든 억까를 이겨 냈지만 던위치로 들어서자 효율적인 덱에 대한 갈망이 커져 갔다. 좋은 조사자를 찾아 티어리스트를 검색하기도 했다. 그렇게 저렇게 구성한 덱을 들고 호기롭게 나서고 또 혼돈의 먹잇감이 되는일이 반복되자 조금씩 지쳤다.

 

 

시나리오에서 쌓은 승점으로 고민고민하며 카드를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시나리오에서 써보기 위해 고민해보고 각을 재봐도 카드가 드로우되지 않으면 그뿐이다. 혼돈의 또다른 축인 조우카드를 잘못 뽑으면 또 끝장이다. 그렇게 처음 게임 시작할 때의 밝은 하늘은 없어지고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진다. 이럴 때 혼돈토큰의 억까가 터지면 멘탈도 함께 터져나간다.

 

억까에 쓰러져 버린 조사자를 뒤로 하고 우리도 지쳐 쓰러져 버린다. 하지만 이내 귓가에 울리는 잘그락 소리. 혼돈 토큰을 고르고 골라 뽑아내서 결국 원하던 결과로 이어질 때의 쾌감과 손맛. 

 

카르코사가 재판되어 개정판을 구매했다

더 강해져야겠다. 아컴호러 카드게임은 개정판의 경우 캠페인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시나리오 카드 확장팩과 플레이어가 게임에 사용할 수 있는 조사자와 플레이어 카드가 포함된 플레이어 카드 확장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플레이어 카드 확장팩은 어떤 캠페인에서건 덱 구성에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강하고 효율적인 덱 구성을 위해서는 플레이어 카드 풀이 넓으면 넓을수록 좋다. 이로써 기본판, 던위치, 카르코사, 잊힌 시대의 카드풀을 갖췄다.

 

강해질 기회의 문은 더 넓어졌지만 포기했다. 카드 수가 너무 많다. 나같은 초보에게는 덱 구성부터가 고역이다. 어떤 덱이 효율적일지 뭐가 더 강할지 고민이 깊어져서 정작 게임을 시작하기 어려웠다. 

 

혹자에게 아딱은 정리가 콘텐츠라고 했던가. 아딱이 다시 생각나서 카드를 만지작 거리기는 했지만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 슬리브를 씌우고 바인더에 넣는 반복 작업만 한나절을 했다. 수많은 카드를 정리하면서 퍼뜩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혼돈, 또 혼돈

그냥 내가 원하는 덱으로 승부를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RP. 이른바 롤플레잉을 하고자 했다. 내 조사자의 역할과 컨셉에 맞는 덱구성. 효율 따위는 잘 알지도 못하므로 과감하게 무시. 쉬움 난이도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재떨이 피트 라는 조사자는 강아지와 함께 다닌다. 보통 난이도에서 플레이를 한다. 별명에 어울리게 담배 카드도 넣어주고 강아지의 친구인 길 고양이 카드도 넣어준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가 결국 도박장에서 건달들한테 털리고 괴물한테 털리고 털린다. 

 

그런데 재밌다.

 

뭐가 강하고 좋은지 모르고 어떤 혼돈 토큰이 나올지 모른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 내가 잘 아는 RP에 매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애완 동물이 아니라 충직한 친구인 듀크에게 차마 데미지를 배정할 수 없었다. 연신 듀크 물어!라고 외치고 이것 찾아와!라고 다그치는 것에 더해 나대신 뚜들겨 맞아달라고 부탁하는 거는 차마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딱은 의지력, 지능, 힘, 민첩 능력치를 가지고 갖가지 상황과 적이 갖는 값과 비교하여 성공/실패를 가르는 게임인데 5가 최대값이다. 4라면 낮은 값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고의 값도 아니다. 혼돈 토큰은 최고의 값을 얼마든지 최악의 값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에 피트와 듀크는 그렇게까지 강력하지 않다. 혼돈 토큰의 위력이 낮아지는 쉬움 난이도에서는 강력한 면모를 보이지만 보통 난이도에서 조차 이 둘은 활약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컨셉에 충실하게 플레이 하니까 어떻게든 게임은 굴러간다.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떻게 하든 일단 게임의 이야기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피날레를 향해 진행된다는 점이다. 

 

피칠갑을 하고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로(아딱에서는 전 시나리오에서 피해나 공포를 받아 쓰러질 경우 육체적 또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앓게 된다) 어딘가로 또 향했을 때 시나리오 시작과 동시에 더 이상의 모험을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내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우리 강아지 목숨까지 걸어가며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조사자 컨셉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리타이어. 피트는 캠페인을 끝마치지 않고 혼돈을 뒤로 한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중간에 밀수꾼 녀석과도 팀을 이루었지만 중과부적이다. 약삭빨라 원래 하던 일은 잘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의지력과 담대함이 부족해서 엄혹한 아컴호러카드 세상에서 풍파를 헤쳐나가기에는 매우 부적합했다. 사이 좋게 둘이 손잡고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전격 합의.

 

도파민도 있다

 

아딱 세상에 억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뭄의 콩나듯, 대략 16.7%의 확률로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 다시 심기일전해서 로랜드와 애그니스로 돌아왔다.

 

기이한 사건을 조사하던 수사관이 탐문하던 중 웨이트리스와 협력한다는 컨셉이다. 이 웨이트리스도 얼마전 기이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마법의 힘에 눈을 떴다. 마법을 익힌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마법을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한다(는 컨셉이다.)

그래서 덱구성이 구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짜고 보니 마법도 적게 넣었고 강력한 마법은 빼고 이상한 마법만 넣었다. 내가 어떤 덱이 좋은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RP의 일환이다.

 

로랜드도 수갑이라는 카드를 넣었는데 캠페인을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유의미하게 사용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전국을 무대로 활약하는 수사관이 뒷주머니에 수갑하나 없다는게 말이 되나.

 

최후의 총알 한발이 적의 미간을 꿰뚫을 때, 능숙하지 못한 마법이 괴물의 정신을 우그러뜨려 곤죽을 만들어 버릴 때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한번의 차례에 3번의 행동을 할 수 있는데 3번 연속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이미 시나리오를 다 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원하던 카드가 적시에 핸드에 들어올 때의 기분도 짜릿하다. 아까 까지는 도망치기 바쁜 나약한 조사자였지만 이제는 누구든 덤비라며 사자후를 외친다.

 

시나리오를 진행하며 점점 강해지는 조사자와 함께 내 플레이도 노련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늦은 밤 졸린 눈을 부여잡고 또다시 잘그락 잘그락 혼돈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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