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구멍이 있다면 축소를 써서라도 숨을텐데


발더게이트3 출시 전 시연영상을 보고 분노를 터뜨렸던 기억과 글이 남아있다. 페이룬? 발더스게이트? 알게 뭐야 내 양자를 내놓아라 류의 분노였던 것 같다. 다시 읽어보면 정확히 기억나겠지만 녹음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묘한 부끄러움을 굳이 재확인하고 싶지 않기에 생략한다.

발더스게이트와 RPG의 팬으로서 한번은 플레이하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50%할인까지 기다려서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출시일, 역시나 수많은 버그와 한글화 이슈 등등등등등 마치 이미 매도한 주식의 가격이 폭락하는 것과 같은 쾌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이내 발더스게이트3는 한동안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한 202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튜브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뜨는 영상들을 보니 나만 빼고 다들 발더스게이트3를 즐기고 있었고 이미 한바탕 파티까지 벌이고 난 후였던 것이다. 명색이 게임블로거인데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갓겜인 발더스게이트3를 해보지도 않고 비난했던 것은 참 더더 부끄러운 일이다.

화-끈


무엇이 발더스게이트3로 이끌었는가


일단 10% 할인을 받았다. 크리스마스에 게임을 즐기라는 배려 덕분에 이득을 봤다.

그래픽이 좋았다. 빔독에서 발더스게이트1, 2를 리마스터?해서 고해상도로 내놨지만 고전게임은 고전 게임이었다. 그런데 발더스게이트3는 번쩍번쩍하다. 요즘 게임 같았다. RPG 팬인 나로서는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기기 어려운 때깔이었다.

한글화가 되었다. 디비니티오리지널신도 참 재밌게 플레이 했지만 영어로 할 때는 고역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게임인지 공부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려서 게임을 켜는 것 자체가 책상 앞에 앉는 기분이 들었다. 발더스게이트3는 깔끔하게 한글화가 되어버려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평이 좋았다. 사실 누구보다 빨리 즐겨보고 ‘평’을 만들어 내는게 내 나름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일에 치이고 돈에 치이다보니 결국 구매전에 심사숙고하면서 과감하게 먼저 뛰어 든 용자들의 평을 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최소 ‘간만에 나온 RPG 수작’은 보장되었다고 판단했다.

발더스게이트3로의 초대


전작과의 비교


여느 시리즈와는 다르게 전작과의 비교는 성립자체가 어렵다. 발더스게이트2가 완전 옛날 게임이고 비교적 최근에 출시된 외전들도 발더스게이트2에서 바로 이어지다보니 옛날 게임이라는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전작을 계승한다는 의미나 성공적인 시리즈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각각 다를 것이다. 로코물에서 세상 모든 인연과 연인이 이어져야지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인공이 결국 이어지지 않으면 지금까지 즐겨왔던 장면장면과 스토리는 다 부질없다고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발더스게이트 3는 당연히 양자의 이야기를 다루어야 했다고, 양자의 자식이라도 나와야 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전작을 계승했다고 말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해피엔딩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만이 해피엔딩은 아닌 것이다. 개연성이 잘 짜여져 있고 복선이 충실해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무엇이든 납득이 가는 좋은 엔딩인 것이다. 용과같이 시리즈도 키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공했다. 라오어와 용과같이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은 전작의 계승에 대한 시각 차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시스템이나 등장인물을 가져와서 유지하는 것이 계승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작의 팬들의 분노를 피할 수 없다. 여기에 한가지 놓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전작에 대한 존중이다. 아니, 오히려 시스템과 등장인물은 다 바꿔도 전작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이미 시리즈물로서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뭐라도 쓰면 거진 다 스포기 때문에 자세히 쓰기는 어렵지만 전작에 대한 존중을 확인할 수 있다. 출시 전 제작자의 인터뷰가 단순 립서비스나 허언이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자체적인 이야기지만 전작의 기억도 되살릴 수 있다. 

존중의 방식이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닌 부분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건 호불호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전작을 대놓고 무시하고 조롱하면서 그 잘난 ‘차별점’을 만들어대려는 요즘 후속작 아닌 후속작에 비하면 말그대로 선녀다.

크흠흠 이정도도 스포일까?


디비니티오리지널신2와의 비교


처음 발더스게이트3 시연 영상을 봤을 때는 디비니티오리지널신2와 너무 유사해서 걱정과 우려를 넘어서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직접 플레이 해보니 달랐다.  디비니티오리지널신2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요소들과 비교해보면 컨셉 자체도 다르고 개선된 점이 많다.

디비니티오리지널신2를 플레이하다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지겨워지는 순간이 온다. 전투와 스토리라는 두 강점이자 게임을 지탱하는 두 축이 흔들거리면서 중반부를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

디비니티오리지널신2의 전투는 특색이 있다. 물, 불, 전기, 대지, 독을 잘 활용하고 조합해서 광역도 펑펑 터뜨리고 상태이상도 걸면서 적을 쓸어버릴 수 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해보면서 감탄하기 바쁘다.

그런데 물방과 마방이 1이라도 남게 되면 상태 이상에 100% 저항한다. 그래서 결국 방어력을 빨리 깎을 수 있는 데미지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강함의 방식이 하나다. 색깔만 다른 데미지 놀이라고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 것이다. 

굴림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


높낮이라는 요소도 너무 과도하다. 판을 넓게 쓰게 해서 플레이어의 머리도 많이 쓰게 해야하는 요소지만 이동기가 많고 상대를 강제 이동시키는 능력도 많다보니 결국 체스처럼 말을 움직이기 바쁘다. 어떤 빌드건 간에 이동기, 강제 이동기 하나씩은 갖추다 보니 캐릭터 특색도 떨어진다. 

이동기로 위치 선점 > 강제 이동기로 상대방 모아주기 > 환경요소 활용하여 광역 대미지 > 데미지로 끝장내기의 흐름이 반복된다.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이 여러가지지만 투박하다. 대화창에서 선택에 따라 주사위 굴림도 하고 이런 대사 저런 대사를 할 수 있지만 결국 자신의 능력치에 맞춰서 주사위 굴림에 성공하면 결과는 무조건 좋다.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어떤 능력치를 선택해도 주사위 굴리는 난이도만 달라질 뿐이다. 

아니면 어쩔래, 앞길을 막지 마라


또한, 해결 분기가 여러갈래로 나뉘지만 레벨디자인 때문에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퀘스트가 이미 해결됐음에도 다른 분기를 꾸역꾸역 해서 경험치를 먹어줘야 한다. 일이 해결 됐다고 해서 바로 휙휙 떠나다 보면 절대적인 레벨의 벽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미 해결한 퀘스트를 다음 회차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경험치를 위해 전투를 치러야 하다보니 진이 빠질 수 있다.

캐릭터들의 스토리도 다소 난해하다. 일단 배경지식이 없는 상황임에도 풀어내는 이야기가 너무 장황하고 비유적이고 맥락없이 느껴질 때가 많다. 도대체 뭘 원하고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비밀로 감춰두는 것이 많고 말해주더라도 무슨 말인지 모르게 말해준다. 쏟아지는 퀘스트 때문에 더 헷갈린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이 전투를 왜 해야하는지 생각이 들고, 단순히 시스템이 시키니까 전투를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생긴다. 

반면에 발더스게이트3는 발전했다. 각 동료 캐릭터의 배경설명과 스토리는 미주알고주알 상세하게 잘 알려준다. 대화가 컷신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더더욱 이해가 쉽다. 표정도 나름 구현이 잘되어 있고 몸짓도 있어서 실제로 대화하는 느낌이라 집중이 수월하다. 전투도 D&D의 주사위 굴림을 통한 내성 굴림으로 돌아왔다. 전투는 이제 변수 투성이라서 지루할 틈이 없다. 이동기 또한 디비니티오리지널신2에 비해서 비용이 크다보니 심사숙고해서 쓰게 되고 제대로 들어맞았을 때의 쾌감이 더 크다. 레벨디자인이 좋다!라고 까지 얘기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냥 내가 진행한 방향대로 쭉 밀고 가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큰 무리가 없다. 그래서 다른 분기에 대한 아쉬움을 남기고 다회차 플레이하기 정말 좋다. 강해지는 것도 더 세련된 방향으로 강해진다. 디비니티에서는 무조건 데미지다. 레벨이 오를수록 약간의 변주는 있지만 강해지는 방향은 결국 데미지 숫자만 더 커지는 쪽이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더 높은 데미지의 아이템을 장착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발더스게이트3는 강함의 방향이 여러가지다. 아이템의 특이한 옵션들이 이러한 요소를 잘 뒷받침해준다. 아이템을 이것저것 끼워주다보면 하루해가 금방 간다.


다만,


파티원은 왜 4명인가. 전통(?)대로 6명으로 늘려주면 좋겠다아아아아아아. 너무 아쉽다아아아아아아. 동료간 상호작용과 아이템 활용을 위해서는 파티 구성이 6명은 돼야한다. 결국 다회차를 할 수 밖에 없지만 4명 조합으로 다회차보다 6명 조합으로 다회차하는 것이 더 재밌을 것 같다.

 

 

왜 4명인가


오리진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좀 유감이다. 발더스게이트3에서는 디비니티오리지널신3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스토리를 지닌 오리진 캐릭터를 플레이어가 선택해서 플레이 할 수 있다. 하지만 디비니티와 마찬가지로 발더스게이트3에서도 매끄럽게 작동되는 느낌은 아니다. 고유한 스토리를 지닌 A라는 캐릭터는 A에 맞는 행동양식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A가 어떤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플레이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간혹 어떤 캐릭터가 좋았다라고 하는 반응이 있는데 이는 그 플레이어의 성향이 마침 해당 오리진 캐릭터와 일치했기 때문이 아닐까. 플레이어가 선택했을 시 약간의 분기를 더해주는 것만으로 A를 플레이하는 즐거움이 더 커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발더스게이트는 디비니티보다 더 발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오리진 캐릭터로 플레이하는 것은 의문이다. 내 경우에는 내가 내 방식대로 오리진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것보다는 내 캐릭터를 내 방식으로 플레이 했을 때 동료들이 어떤 상호작용과 반응을 할지 생각하고 확인하는 것이 더 즐겁다. 제작사의 역량으로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는데 굳이 평범한 나의 손을 거치게 할 필요가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사소하지만 마찬가지로 이유로 동료 캐릭터 능력치와 클래스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것도 유감이다. 매력적이고 멋진 캐릭터를 잘 만들어 냈는데 굳이 그들의 정체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게 만들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언제든 대체 가능한 ‘NPC’가 아니라 고유한 특성을 지닌 ‘동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오리진 캐릭터는 수정이 불가능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어차피 필요한 능력치와 클래스의 동료는 인게임에서 얼마든지 생성해서 고용할 수 있는데 굳이 고유 캐릭터까지도 수정가능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연금술도 굉장히 간단해졌다. 3의 법칙!만 외우면 된다.


D&D의 꽃은 스펠이다. 그런데 스펠의 제한이 많다. 바로 집중이라는 요소다. 스펠 캐스터는 특정 스펠을 시전할 경우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중을 해야한다. 집중은 하나만 유지할 수 있다. 전작에서는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버프를 떡칠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지만 발더스게이트3에서는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버프는 집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버프떡칠로 인해 전투가 쉬워지는 일은 없어졌지만 다양한 스펠을 활용하는 길도 막혔다. 하나의 스펠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가성비가 좋은 스펠만 쓸 수 밖에 없다. 공격을 받으면 내성굴림에 의해 집중이 깨질 수도 있어서 스펠캐스터의 위상은 전작에 비해 더 떨어진다. 행동과 보조행동으로 자원이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집중도 강한집중인 ‘몰입’과 그냥 집중으로 나뉘어져있으면 스펠 활용도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너무 재밌다. 자잘한 버그들도 하루속히 바로잡히길 바란다.

 

2020.02.29 - 디비니티오리지널신 3, 아니 발더스게이트 플레이 영상을 보고

 

디비니티오리지널신 3, 아니 발더스게이트 플레이 영상을 보고

한달 전부터 위쳐3 인핸스드 에디션을 플레이 하랴, 최근에 대규모 패치를 실시한 에이지오브원더스 플래닛폴 하랴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포스팅이 굉장히 뜸했다. 게임에 빠져드는 만큼 overh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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