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경계심-욕심

예전 워해머2가 일주일정도 무료 플레이 풀렸을 때 잠깐 해보았지만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복잡한 유닛, 내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부대, 단순한 내정, 긴 로딩 등 전략시뮬레이션 류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제한된 기간 동안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날 스팀에서 공짜로 토탈워 쇼군2를 줬다. 공짜라면 뭐든 쟁여두고 일단 쟁여뒀으면 한번쯤은 설치 해보는 것이 인지상정. 역시나 큰 재미는 없었다. 그런데 워해머2 때와 다르게 뭔가 관심이 간다. 역사를 바탕으로해서인지(이른바 역탈워) 유닛이 현실적이어서 직관적이고 훨씬 단순했다. 기병도 움직여보고 궁수도 깔아보고 보병도 뭉쳐보았다. 튜토리얼만으로도 진땀을 뺐지만 갑자기 토탈워라는 시리즈에 관심이 생겼다. 물론 쇼군2는 삭제 했다.

판타지 세상의 전쟁은 어떤 모습일까. 현대전에 중세 스킨을 씌운 모습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괴수가 수백 보병을 으깨고 하늘에서는 마법 벼락이 떨어진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묘한 기대감이 생겼다. 쇼군2 덕분에 기초를 어느정도 배워서인지 예전처럼 마냥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사기에는 좀 부담스러웠다. DLC도 너무 많고 불멸의제국이라는 캠페인을 즐기려면 워해머1도 사야하고 또 워해머1에 딸려있는 DLC도 너무 많고 아무튼 살 것이 너무 많았다. 사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의 알람이 계속 울렸지만 50% 할인 스팀 알림 소리와 함께 일단은 오리지널만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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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조언가가 정말 말이 많다


그때 다샀어야 했다.

50시간의 튜토리얼을 마치고

너무 복잡한 게임 싫어한다. 너무 긴 게임 싫다. 게임이 부담스러우면 싫다. 3시간 정도 기관총 처럼 쏘아대는 조언과 튜토리얼을 들으니 구매가 급 후회스러웠다. 게임을 끄고 며칠동안 게임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플레이가 뜸했다.

산 돈이 너무 아까웠다. 끙끙 앓기도 했지만 여전히 키기는 싫었다. 그런 내 앞에 짱세고 짱멋진 공룡탄 공룡 리자드맨이 나타났다. 너무 악당같은 외모에 괴물느낌이 강해서 초보자용이 아닌 것 같아 피했는데 의외로 주인공 급의 선한 팩션이다. 그리고 나같은 초보자가 쓰기에도 충분히 강하다.

계속 한계에 부딪혔던 처음 몇번의 전투를 리자드맨과 함께 수월하게 넘기고 났더니 뽕이 차오른다. 사실 난이도를 쉬움으로 두었음에도 익숙하지 않은 UI와 토탈워라는 게임 특유의 시스템 때문에 전투가 엄청 큰 벽으로 다가왔다. 내정도 다른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 비해서는 단순하다고 하지만 플레이어가 반드시 선택 해야하는 부분이 있어서 마냥 쉽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내정 자체가 게임의 한 재미를 담당한다기 보다는 전투의 준비 단계같은 느낌이라 전투를 잘 모르면 자연스럽게 내정도 어려워진다. 단순하지만 어려운 내정, 복잡하고 어려운 전투가 나를 괴롭혔지만 공룡탄공룡님이 와서 그 괴로움이 끝난 것이다.

뭔가 엄청 어려운 첫번째 전투를 끝낸 감격에 찍은 피칠갑 사진

바로 블러드 DLC를 샀다. 우리 사우르스가 쇠곤봉으로 혐오스러운 쥐돌이들의 머리를 박살내는 장면을 더 실감나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가 튀는 효과를 돈을 주고 산다고? 단순 그래픽 옵션을 돈을 받고 판다고? 다른 게임 같았으면 욕부터 박았겠지만 정말 아직도 왜인지 모르겠지만 거부감이 없었다. 술에는 돈만원 금방써도 게임에는 천원 한장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타입인데 이 DLC는 당연히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벽을 넘어서니 부담감은 확 줄고 도전욕이 생긴다. 이 유닛을 활용해 봐야지, 이런 진형으로 싸워봐야지, 이 마법을 지져봐야지, 유튜브에서 본 전술을 써봐야지 이런저런 아이디어와 함께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이 게임을 키게 만든다. 게임이기도 하지만 가히 전투시뮬레이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해보고 싶었던 것이 모두 구현되어있다.

공탄공의 위엄, 수턴내로 전멸할 운명이다

엔딩까지 수십시간의 '튜토리얼'을 거치며 복잡한 토탈워 워해머에 대한 분노보다는 오히려 여타 다른 단순한 게임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게임 캐릭터라지만 죽을 때까지 플레이어의 명령에 따라 싸우는 게 말이돼? 옆구리를 맞거나 뒷통수를 맞았는데 어떻게 정면에서 맞은거하고 데미지가 같을 수 있어? 지형 뒤에 숨었는데 왜 총을 맞아? 어떻게 저렇게 큰 규모의 군대가 명령에 따라 바로바로 움직여? 저 총에는 총알이 무한대로 들어있나 어떻게 계속 쏴?

쥐돌이에게 물어뜯겨 겁에 질린 공룡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허탈해질 때도 있었지만 화려한 꼬리치기로 쥐포를 양산할 때의 쾌감이 굉장하다.

음험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지만 세상을 구원한 모습이다

4번의 패배 5번째 시도 끝에 겨우 쉬움 난이도 엔딩을 보았다. 플레이 15시간째부터는 시간을 잊고 플레이 했다. 아는만큼 더 재밌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장점도 단점도 명확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전쟁시뮬레이터

내정과 전투 모두 전쟁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내정도 그렇고 전투도 그렇고 지루한 부분은 모두 쳐냈다. 누구와 싸우고 무엇으로 싸울지 선택하고 나면 내정은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너무 쉬운 전투, 어차피 해봐야 질게 뻔한 전투는 자동전투를 넘기면 된다. '컴퓨터는 내가 진다고 봤지만 내가 유닛과 마법을 활용해서 결국 아슬아슬한 역전승을 해낼 수 있는' 전투에만 집중하면 게임은 술술 잘 굴러간다.

캠페인에서도 지루함을 많이 덜어냈다. 전략시뮬레이션 특유의 후반부 대세가 기울어진 뒤의 지루함이 굉장히 적다. 굳이 넓은 맵을 다 정복하거나 모든 적을 박살낼 필요없이 캠페인 목표만 달성하면 엔딩이다. 사실 처음에 엄청나게 넓은 캠페인 맵을 보고나서는 현타와의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웬걸 어떤 진영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어느새 게임이 끝나버렸다.

하다보면 의외로 외교도 재밌다

공성전, 수성전, 땀내나는 모루전, 망치전, 유격전, 마법전, 원거리전, 공중전, 괴수전(!), 일기토 등등 다 해볼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긴 하겠지만 다행히 해전은 없다. 쇼군2에는 있었는데 내 경우에는 크게 인상깊지 않아서 해전이 없는 것이 더 낫다. 수천병력이 투닥거리는 걸 보다보면 마치 내가 제갈량의 북벌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우군과 등을 맞댄 방진으로 오크군대에 대적하고 있지만 중과부적


다양한 팩션이 있다. 돈을 내야 한다는 단점과 연결되겠지만 오리지널과 공짜 DLC로도 초보자에게는 충분을 넘어서 넘친다. 워해머2 기준으로 선택가능한 팩션은 4개(다크엘프, 리자드맨, 귀쟁이 하이엘프, 스케이븐)가 있고 리용세의 기사단인지 뭔지 추가로 주고 또 각 팩션마다 전설군주가 여럿 있어 같은 팩션이라 하더라도 전설군주에게 주어지는 진영효과, 개인 특성 덕분에 다른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 전설군주별로 캠페인맵에서 시작하는 위치가 고정되어 있어서 주로 상대하는 적이 달라지는 것도 구분점이라 할 수 있겠지만 랜덤 스타팅이 없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오히려 아쉬운 점이 아닌가 싶다.

컴퓨터가 사고싶다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개선된 턴 로딩! 이라고는 하지만 중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거슬리긴 하다. 빠른 저장 로드의 로딩도 거슬린다. 전쟁통에 멋진 부대원들 좀 살펴보려고 줌인을 땡기면 가성비가 적용된 내 컴퓨터에서는 여지없이 프레임 드랍이 발생한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듯이 힘겨워하는 컴퓨터를 위해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다른 때 같았으면 게임에 열받았겠지만 이번에는 사양이 낮은 컴퓨터가, 그리고 빠른저장과 로드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낮은 실력이 더 원망스럽다.

토탈워 워해머2, 당연히 완벽한 게임은 아니다. 그런데 단점을 쓰자니, 리뷰를 더 깊게 쓰자니 별로 한 게 없어서 쓸 수없다. 분명 불편한 점도 있고 마음에 안드는 부분도 있는데 어쩌면 내가 몰라서 그런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섣불리 쓰기 두렵다. 굳이 말하자면 바로 이런 점 자체가 토탈워 워해머2의 가장 직관적인 단점이 아닐까 싶다. 진입장벽은 일단 높다. 그런데 그 장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보면 그것만으로도 뭔가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난 김에 DLC관련해서는 좀 까야할 것 같다 물론 나중에는 다 살거지만. 유료 DLC는 대부분 새로운 유닛이 추가되는 DLC인데 내가 보유하고 있지 않아도 게임 내에 구현이 되어있다. 게임 내 연구, 건설, 생산 관련 툴팁에도 버젓이 설명이 실려있어서 엄청 헷갈리는 데다가(가지고 있지도 않은 걸 생산하는 건물, 강화하는 연구, 스킬에 대한 설명) 상대AI는 DLC유닛을 써먹기 때문에 없는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어려운 게임이 더 어렵다. 계속 반복하지만 그럼에도 게임에 화가 나기보다는 그 DLC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다.

후속 리뷰는 다른 팩션으로도 엔딩 보고, 워해머3가 나올 때(2021년 하반기 출시 예정) 분명히 워해머2 DLC 할인을 할테니 그 때 몽땅 지르고 또 이것저것 가지고 놀아본 다음에야 쓸 수 있지 않을까.

외로운 공룡의 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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