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보드게임 얘기다. 

클릭질과 단축키 연타 소리가 들린다. 리드미컬한 소리가 신명나지만 막상 컴퓨터 앞의 표정은 심드렁하다. 연신 'ㅋㅋㅋ'를 치지만 실제 입꼬리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서로 마주 앉은 채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 거릴 뿐이다. 뭔가 따분하다. 숙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지겹다. 호흡이 긴 게임을 하다 보면 그냥 재미가 없어질 때가 있다. 

몇시간 몰입해서 신나게 즐기고 끝나는 게임은 없을까. 기왕이면 혼자보다는 여럿이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버튼만 클릭하는 단순함을 벗어나 색다른 재미를 주면 좋겠다. 요즘 게임은 너무 다 떠먹여줘서 아무 생각없이 플레이하게 되는데 머리 좀 굴리면서 게임하고 싶다.


시뮬레이터니까 일단 게임은 아니다

테이블탑 시뮬레이터는 말 그대로 보드게임을 구현할 수 있는 시뮬레이터다. 실행해보면 손, 테이블, 카드나 주사위 같은 몇가지 컴포넌트와 마주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는 재밌는걸 해볼 수 없다. 스팀의 창작마당으로 들어간다. KOR을 입력한다. 능력자들이 심혈을 기울인 보드게임 목록이 쫙 펼쳐진다. 

다양한 보드게임을 공짜로! 즐길 수 있다


우리에게 아주 친근한 고스톱, 윷놀이, 부루마블부터 메이지나이트 같이 굉장히 복잡해보이고 생소한 게임들을 쭉 보다 보면 보드게임이 이렇게 많았나 놀라게 된다.

어차피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 마음에 드는 것을 한 번 받아본다. 뭘 로딩을 하고 그럴싸한 컴포넌트들이 그럴싸한 곳에 배치됐는데 정작 이걸로 또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 테탑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테탑시도 잘 다뤄야 하고 개별 보드게임에 대해서도 익혀야 한다. 골치가 아프다.

일단 테탑시 자체는 익히기 어렵지 않다. 인터페이스가 전반적으로 직관적이고 튜토리얼도 잘 마련되어 있다. 바로 게임에 돌입하기 보다는 준비된 튜토리얼부터 해보는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클릭하고 드래그하고 흔들고 뒤집고 돌리고 던지고 합치고 섞고 나누고 굴리고 쓰고 그리고  옮기고 튕기다 보면 일반적인 게임에서 느끼기 어려운 '캐릭터가 아닌 내가 직접 플레이 하는' 즐거움을 조금씩 느낄 수 있다.

개중에는 아예 업체에서 스크립트까지 풀로 만들어주는 보드게임도 있다. 


보드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이 충실하다. 여러 도구로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컴포넌트를 조작할 수 있다. 보드게임하면 역시 상호교류다. 당연히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다. 친숙한 게임 하나 골라서 방을 파두면 하나둘씩 들어온다. 채팅창도 당연히 있다. 음성 채팅도 가능하다. 내 손짓 상대 손짓 모두 보인다. 내가 물건을 들면 상대에게도 바로 보인다. 상대가 물건을 들면 나에게도 바로 보인다. 당연한 건데도 뭔가 보고 있으면 진짜로 같이 플레이 하는 기분이 든다. 또한 스크립트 기능도 제공해서 완성도 높은 창작모드의 경우에는 귀찮은 컴포넌트 정리나 배치가 반자동으로 이뤄져서 훨씬 편리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화면으로만 봐도 엄청 복잡하다. 진짜 보드게임 살려면 돈만원은 우습게 깨진다


시뮬레이터다 보니 콘텐츠만 받쳐주면 가성비가 확 올라간다. 대형 문구점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보드게임은 생각보다 비싸다. 웬만한 매니아가 아닌 이상 구비 해놓기 어렵다. 좀 비싼 것 같아도 보드게임카페를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테탑시의 경우 스팀에서 판매하는 개별 보드게임 DLC를 제외하고는 다 공짜로 창작마당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저작권을 사서 만든 것 같지는 않고 제작사에게 아직 들키지 않았거나 그냥 내버려두는 것 같다. 재미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비싼 게임을 부담 없이 한 번 돌려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가장 구하기 어려운 DLC

같이 플레이할 사람이 없다. 4pack이라고 해서 패키지 4개를 싸게 살 수도 있고 50%할인도 비교적 자주 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나눠주는 금전적인 부담은 크지 않다. 하지만 일단 주변에 나눠줄 사람도 없고 설혹 나눠준다 하더라도 같이 플레이 하기는 더 어렵다. 보드게임이라는 특성상 Friends&Betrayers DLC 같은 핵심 DLC가 없으면 재밌게 즐기기는 어렵다. 1인 보드게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옆에서 울고 웃는 사람이 없으면 흥이 떨어진다.

혼자서 할 때는 정령섬이 제일 재밌었다... 정령 두개 골라서 하면 되니까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창작마당에서도 받을 수 없는 이 DLC는 가까운 주변 사람과 하든 멀티플레이를 통해 전세계인과 어울리든각자 알아서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는 것이 테탑시의 가장 큰 장벽이 아닌가 싶다.

Friends&Betrayers DLC 구매법

무슨 게임이든 다 마찬가지지만 결국 영업질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보드게임의 영업질은 그 난이도가 더 높다. 화려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고 인지도도 높지 않다. 그리고 일반적인 게임은 내가 사람만 데려오면 나머지는 게임이 다 알아서 해주는데 보드게임은 플레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업질도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대상 물색이 가장 중요하다. 관심이 아예 없는 사람에게는 시도조차 안하는 것이 좋다. 시간낭비다. 게임에서는 룰이 가장 중요한데 보드게임 특성상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참가 플레이어가 모두 룰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관심 없는 사람의 경우 억지로 끌려와서 일단 자리에는 앉아있지만 룰 설명이 조금만 길어지면 금방 싫증도 나고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냥 롤이나 하러가자"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일단 대상이 정해졌으면 막무가내로 같이 하자고 하는 것이 좋다. '그 시답잖은 놀이를 왜 하냐고~' 불평하다가 어느새 그 시답잖은 놀이에 흠뻑 빠져들어서 낄낄대고 놀았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잘 알지도 못하고 익숙하지도 않은 것을 할 때는 마음이 별로 동하지 않는다. 하고 싶으면 하고 말꺼면 말고 라고 해서는 마음이 움직일 리 없다. 누군가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어도 될까말까다. 민폐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권유의 형식은 일단 무조건 해보자고 하는 것이 성공률이 높다.

보드게임은 룰 대로 할 때 가장 재밌다. 나의 오래된 생각이다. 나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돈받고 팔려고 끙끙 머리를 쥐어 짜낸 결과물이 룰이다. 범부인 내가 함부로 어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룰을 어기면 안된다. 그러자면 룰부터 잘 설명해야 한다.

처음부터 룰북을 그냥 던져주거나 룰설명 동영상을 보여주는 것은 최악의 방법이다. 처음 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글이나 영상만으로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고 관심도 떨어진다. 

룰 설명은 최대한 간결하게 한다. 잔룰은 쳐낸다. 게임의 최종목표부터 설명한다. 승리조건과 패배조건부터 알려주면 과정에 대한 이해도 높아진다. 그리고 컴포넌트를 앞에 두고 말로만 해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온라인게임처럼 바로 튜토리얼 플레이로 들어간다. 

아기자기한 컴포넌트들을 마음대로 집어 던질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니턴내턴 돌아가면서 플레이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턴일 때는 왜 이런 플레이를 하는지 의도를 말해주면 더 효과적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컴포넌트를 다루는 행동을 통해 룰을 더 잘 익힐 수 있고 그 자체가 재미이기 때문에 상대턴에 답답하다고 해서 게임에 필요한 행동을 대신 해주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지혼자 뭐 알아듣지도 못할 말 떠들면서 주사위도 맘대로 휙 던졌다가 카드도 가져갔다가 말도 어디 옮겼다가 자원도 가져갔다가 혼자 낄낄 대다가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자기턴에만 열심히 하면 된다.

룰북은 게임이 어느 정도 움직이기 시작할 때 등장하면 된다. 게임에서의 승리 경쟁이 심화되고 배신이 판치고 억울한 상황이 들이닥칠 때 법에라도 호소하기 위해 룰북을 꺼내드는 것이다. 그 쯤되면 찾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찾고 해석도 열심히 한다.

룰은 지키되 에러플에는 너무 연연하지 않는다.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룰을 어기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면 모르고 한 에러플은 재미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간 에러플을 다시 되돌린다고 여태 했던 플레이를 되돌리는 것이 훨씬 더 재미를 해친다. 대충 그 시점에서 적당한 보상을 주거나 다음에는 안 그러기로 하면 된다. 법에서도 선의의(모르고 한)계약 당사자를 보호해주는데 보드게임에서 안될 이유가 없다. 룰북의 해석이 애매한 경우에도 너무 깊게 따지지 말고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석해서 적용해도 게임 돌아가는데 큰 무리가 없다. 그 시점에서는 동일한 룰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세부사항이 맞느냐 안맞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창작마당 좋아요는 제작/번역자의 힘이 됩니다(나름 유명한 보드게임, 스플렌더)


라켓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사람한테 백날 배드민턴 룰에 대해 알려주거나 열심히 모범자세를 보여줘봐야 소용이 없다. 이길려고 애쓸 필요도 일부러 져줄 필요도 없다. 처음에는 그저 셔틀콕을 받아주고 되돌려주면 된다. 

다들 무슨 기분인지 알 것이라 믿는다


애를 쓴 결과 겨우겨우 몇 가지 보드게임을 성공적으로 돌려볼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도 멀티플레이를 해볼 수 있었다. 확실히 색다르고 재밌었다. 웰컴백투던전을 시작으로 정령섬, 황혼의 투쟁, 스플렌더, 클랭크!, 메이지나이트, 샤오리아 등을 특히 재미있게 플레이 했다. 이 중에 몇가지 게임은 다음 포스팅에서 다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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