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언젠가 물린다. 지겨워 진다. 게임 중에서 특히 RPG, 또 그 중에서도 엔딩이 없는 MMORPG에서는 아쉬움을 넘어 분노까지 느껴진다. 이에 대한 한탄이다.

종적성장 콘텐츠의 한계

캐릭터가 마냥 세지는 것, 재화가 마냥 쌓이는 것 자체가 콘텐츠인 게임은 한계가 명확하고 빨리 온다. 앞선 뻘소리에서도 말했지만 소년만화의 재미가 사라질 때는 주인공이 강해지기'만' 할 때다. 그런데 너무 많은 게임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결국 항상 그리워 다시 돌아온다

MMORPG는 정말 애증의 장르다. 항상 그 지루함에 질려 도망쳤다가도 또 그 특유의 아련함 때문에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지도 모르겠다. 이런 류의 게임을 볼 때마다 자신의 꼬리를 먹고 있는 뱀이 떠오른다. 계속 뭔가 먹고 있으니 죽죽 자라겠거니 생각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더 이상 삼킬 부분도 없을 만큼 쪼그라들어 초라한 모습이 된다.

종적 콘텐츠의 가장 큰 문제는 기존 콘텐츠가 버려진다는 점이다. 만렙이 50렙이었다가 60렙으로 풀리는 순간 59까지의 콘텐츠는 버려진다.  70렙이 되면 69까지가 버려진다. 콘텐츠 늘리기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한계를 맞는다. 어떤 사람은 100렙, 어떤 사람은 200렙, 어떤 사람은 1,000렙으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위화감이 됐건 현타가 됐건 더 이상 콘텐츠가 쉽게 소화되지 않는 시점이 온다.

처음 레어템을 먹었을 때의 감동은 쏟아지는 전설템 폭격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첫 보스 클리어의 감동도 칠흑의아스트랄우주를아우르는악마4대천황제1황벨제브브 레이드를 마칠 때 쯤이면 기억도 안 난다. 7원죄대악신초우주진암흑젤잘나가를 잡을 때 쯤이면 벨제브브 또한 잊혀질 것이다.

여태껏 내가 했던 플레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 현타가 온다. 나라를 뒤집겠다고, 세계를 멸망시키겠다고 날뛰던 보스가 다음 업데이트 후에는 그 보다 딱 1레벨 더 높은 칠흑의 영혼 멧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는 순간 게임에 대한 흥미가 팍 식어버리는 것이다.

 

콘텐츠 소비속도가 개발속도에 비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어느정도 양해해야 한다.


콘텐츠 소비속도가 빠를수록 오히려 종적콘텐츠 추가를 지양해야 한다. 앞서 말했다시피 종적콘텐츠는 필연적으로 기존 콘텐츠를 갉아먹는다. 게임의 볼륨이 생각보다 커지지 않고 최악의 경우 오히려 쪼그라든다. 장르가 달라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고인물이 많다는 이유로 롤에 계속해서 더 센 챔피언이 추가된다고 하면 그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횡적콘텐츠가 도대체 뭘까

 

종적콘텐츠는 많이 겪어보고 많이 봐서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횡적콘텐츠는 도대체 뭘까. 요즘 웬만한 게임에는 다 있는 농사짓고, 광물 캐는 이른바 생활형 콘텐츠가 횡적콘텐츠인 것일까.

뜬금없을 수 있지만 무산소와 유산소 운동을 나누는 기준이 생각난다. 예전에는 달리기는 유산소, 덤벨들기는 무산소처럼 종목을 기준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1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리면 무산소 운동에 더 가까워지고 덤벨도 가벼운 걸 들면 유산소 운동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또 몸이 가벼운 사람에게는 100미터를 20초에 뛰는 것이 부담이 없을 수 있지만 몸이 무거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력달리기일 수도 있는 것처럼 누가 하느냐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확히 어떤 콘텐츠가 종적 콘텐츠다, 횡적 콘텐츠다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기본적인 개념은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할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는 것, 내가 생각하는 횡적 콘텐츠의 개념이다. '할 일'에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아직 하지 못했다는 불안감 내지는 초조함이 느껴진다. 레벨 제한이 풀린다, 유물력이 추가됐다, 아이템 강화제련봉인해제마력주입합성이 추가, 에픽레전설 등급 추가, 반지목걸이귀걸이팔찌부적유물석에 이어 발찌 아이템 추가, 와 같은 업데이트가 마냥 환영받지 못하는 것도 숙제가 늘었다는 부담감 때문은 아닐까. 

새로운 클래스가 추가되는 업데이트의 경우에는 새 클래스가 너무 좋게 나와 기존 캐릭터가 버려질까 하는 우려는 있어도 부담감은 없다. 재미 없어 보이면 안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반면 새로운 던전이나 보스 추가는 미묘하다. 일견 탐험과 도전할 것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새로운 던전과 보스는 '더 좋은' 아이템을 드랍하고 '더 강한' 스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텐츠를 즐기려면 더 강해져야 하고 더 강해지려면 더 노가다를 해야하고 더 노가다를 하려면 더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안 즐기자니 나만 뒤처지는 상황에서 추가된 콘텐츠를 '즐긴다'는 표현을 써도 되는 지에 대한 의문마저 든다.

'다른' 아이템과 아이템 세트, '다른' 던전과 보스, '다른' 지역이 추가되는 것은 앞서 실컷 욕한 종적 콘텐츠와 비슷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기존 콘텐츠를 갉아 먹지 않는다면 횡적 콘텐츠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이템의 외형이 개성적이라든지 기믹이 다르다든지 세트효과가 다르다든지 하면 플레이어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선택할 수 있다. 결국 게임의 마지막 콘텐츠가 외형 꾸미기, 이른바 룩딸 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런 콘텐츠는 추가 될 수록 부담감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추가되는 것도 플레이어의 선택지를 늘려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역시도 또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새로운 스토리는 '더 어려운' 지역, '더 좋은' 아이템과 결합되어 기존의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할일을 늘려서 플레이어를 또 더 괴롭힌다. 

횡적콘텐츠는 어렵다

현실세계에서는 5만원짜리 지폐가 새로 발행된다고 해서 만원짜리 지폐를 거들떠도 안 보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게임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횡적콘텐츠를 추가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횡적콘텐츠는 재미를 주지 못하면 금방 생명력을 잃는다. 한다고 해서 강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이득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유저가 콘텐츠를 즐기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상대적으로 종적콘텐츠는 이 부분이 쉽다. 하면 강해지고 안하면 뒤처진다는 간단명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하듯 자연스럽게 콘텐츠도 종으로만 흐른다. 기존에 있던 횡적콘텐츠도 자꾸 제대로 자리를 못잡고 결국 어어 하면서 종으로 끌려들어가 변질 된다. 쿠키, 골드, 크리스탈, 플래티넘, 실링, 엔도, 크레딧, 다이아몬드, 생명석, 월영석, 사혼의 구슬 조각(?), 영혼 파편, 크라운 등등 잘게 쪼개진 재화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처음에야 기존 재화와 연계된 콘텐츠에서 벗어난 새로운 콘텐츠와 재화를 제공한다는 의미였겠지만 지금은 단순히 콘텐츠 소비 속도를 간신히 늦추는 꼼수 역할 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새로운 콘텐츠를 추가해도 재미가 없다보니 유저들의 호응이 없고,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다시 기존 콘텐츠와 연계된 보상체계에 편입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투기장, 전쟁 같은 PVP 콘텐츠를 추가하고 승리포인트 재화를 추가해서 콘텐츠를 확장시켰다 싶다가도 밸런스 문제, 서버 등등 문제와 함께 유저가 흥미를 잃고 떠나면 그들을 붙잡기 위해 유인책으로 보상을 마련한다. 보상에 대한 설계라도 제대로 이루어 진다면 좋겠지만 그런거 없이 그냥 단순히 더 센 보상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적콘텐츠로 변질되는 것이다. 보상이 좋으면 다들 그 콘텐츠만 하고 보상이 안 좋으면 아예 버려진다. 이 과정이 반복되고 재화의 종류는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물론 콘텐츠를 횡으로 늘리는 방법도 있다. 각 콘텐츠의 보상 밸런스를 기계적으로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종으로 바뀐 콘텐츠를 억지로 횡으로 늘리면 부작용이 발생한다. 내가 원하는 콘텐츠만 즐길 수 없고 마치 숙제를 하듯이 여러 재화를 모으기 위해 억지로 일퀘처럼 다양한 콘텐츠를 매일매일 강제로 '즐겨야'만 하는 것이다. 뒤처지지 않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여전히 재미는 없다.

복귀유저이자 뉴비의 넋두리

최근에 던파를 몇년만에 접속해보았고 로스트아크를 처음 해보았다. 막막했다. 가야할 목표지점은 너무 멀어서 보이지도 않게 멀리 있는데 가는 길도 녹록치 않아 보인다. 길이 어렵다거나 장애물이 많다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풍경만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할일은 많은데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예전에 열심히 파밍했던 아이템은 모두 쓰레기가 되어있었다. 장비칸은 빈칸이 숭숭 뚫려있다. 나를 울리고 웃겼던 보스는 잡몹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지루함과 막막함에 옆을 돌아본다. 말이라도 걸어볼라치면 모두가 스펙업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도서관 한가운데서 나만 혼자 소란스럽게 민폐를 끼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냐. 

 

MMORPG가 그리울 땐 엘더스크롤 온라인(리뷰 링크)이나 합시다. 종보다 횡이 더 강조된 게임은 몇년만에 복귀해도 큰 부담이 없다.

힘세고 강한 카-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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