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스크롤 온라인 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번역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지만 점점 기존에 남들이 해 둔 번역을 수정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비문, 해석 오류, 어색한 문장, 틀린 단어 등 가히 난독의 시대(개인적으로는 독자의 문제보다 저자나 화자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라 부를 만한 요즘 세태에 걸맞은 문제가 사례별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일부 번역 참여자의 태도는 실망스럽다. 애초에 좋지 못한 의도로 보상만을 노리고 번역기를 돌려 복붙하는 사람들이야 걸러내지 못하는 검수시스템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다루는 대상은 열심히 하고 있지만 번역 퀄리티 지적을 받는 사람들이다. 일부긴 하지만 기껏 해줬더니 고마운줄 모르고 징징댄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반응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원봉사건 선한 의도건 뭐건 일단 이용자의 불만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한글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돕는 데 기여하겠다는 애초의 좋은 취지는 퇴색된 것이다. 여기다 대고 내 원래 의도는 좋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정말로 좋은 의도였다면 변명을 멈춰야 한다. 용기를 내서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개선할 것은 개선해 나가야 한다.


정말로 좋은 의도였다면 나쁜 결과를 지적 받았을 때 수용해야 한다

'의도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많이들 말한다. 일을 하다 보면 잘해보려고 했는데 결과가 안 좋을 수도 있고 애써 준비한 것들이 물거품이 될 때도 있다는 점에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짧은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큰 차이가 온다.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결과는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자신의 선함이나 좋은 의도만 믿고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 원래 의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의도가 좋아도 결과는 안 좋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니 일이 벌어진 건 어쩔 수 없다' 는 식의 면피성 해석이 더 힘을 얻는 것 같다. 일이야 어찌되었든 내 좋은 의도를 존중해달라고, 내가 들인 노력의 대가를 어떤 형태로든 보상해달라고 주장 할 때 의도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이 쓰이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다.


언어는 학습하는 것이다. 국어도 언어다.

게임 번역 관련해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국어라는 이유만으로 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충 뜻만 통하면 되는 거니까, 어쨌든 영어를 한글 형태로 바꿔 놨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결과물에 대한 지적에는 발끈하고 자신의 '좋은 의도'에는 관대한 것 아닐까. 

신경은 좀 쓰이지만 크게 유감은 없다


그래서인지 번역 결과물을 보면 영어 해석 보다는 국어 표현 쪽에 문제가 더 많다. 단순히 맞춤법에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맞춤법은 지금에 와서는 사실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제, 요세, 냄세 등 'ㅐ'를 'ㅔ'로 쓴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상대방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껴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경이 좀 쓰이는 것처럼 작품 몰입도가 좀 깨지는 정도다. 진짜 문제는 의미 전달 자체가 되지 않는 비문과 틀리거나 어색한 단어 사용이다. 자기는 자기가 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까 싶을 정도로 몇 번이고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 많아도 너무 많다. 영어 원문을 봐야 비로소 의미를 알 수 있는 국어 문장이라니 참담함을 느낀다. 프로 번역가가 아닌 이상 당연히 2개 국어 능력자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다들 적어도 1.5개 국어 사용자가 번역을 해주길 원하지 않을까. 하지만 0개 국어 능력자가 번역을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마저 나온다.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단어의 정확한 뜻보다는 일종의 어떤 이미지, 느낌적인 느낌에 근거해서 단어를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다. 비단 번역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접하는 콘텐츠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양구의 군인 대우 관련해서 짤과 메시지를 이어 붙인 콘텐츠를 보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주민들의 무시에 군인들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묵비권' 밖에는 없었다는 내용이었는데 갑자기 뭐 체포를 당했나? 뭔가를 빠트리고 봤나 싶어 다시 봐도 묵비권이라는 말이 나올 만한 상황은 없었다. 아마 침묵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쓴 것 같다. 침묵을 지킨다거나 억울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라는 식의 표현보다 왠지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말이 더 그럴듯해 보여서 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어를 잘못 사용하면 서로 간에 오해와 갈등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들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싶은 상황을 본 적이 있다. 카페에서 A가 큰 가방을 들고가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B의 음료를 쳐버렸다. A는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고 세탁비와 음료비도 물어주겠다고 해서 B도 크게 화는 내지 않고 궁시렁 거리면서 대충 상황은 진정되는 듯 했다.  그런데 갑자기 A가 말했다.

'제가 사과도 드렸고 물어드리기도 할테니 적반하장으로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기분 푸시기 바랍니다.'


적반하장? 내가 뭘 잘못했다고!를 시작으로 진정되던 갈등 상황은 다시 2라운드를 맞이하게 됐다.

A는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라고 생각했을지 아직도 궁금하다. 제대로 알고 쓴 것 같기에는 태도도 공손하고 사과의 내용도 비꼬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적반하장이라는 단어가 하도 많이 사용되다 보니 공격적인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적반하장을 단순히 '역으로' 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 것을 보면 이 쪽이 맞는 것 같다. 혹시 몰라 말해두자면 적반하장의 의미는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화를 내는 경우를 말한다.

잘못된 단어 사용의 폐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보전달도 왜곡한다. 커뮤니티에 많이 퍼져서 유명해진 금일과 금요일, 3일과 사흘(아마 이틀을 2틀로 쓰는 사람이 많다 보니… 4흘로 생각한 것일까)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어설프게 사용했다가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불가피라는 단어도 종종 잘못 사용된다. 불가피라는 말이 더 있어 보여서인지  불가능은 너무 단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너무 큰 단어라고 생각해서인지, 어째서인지 불가능 이라는 말 대신 불가피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 개인사정으로 영업이 불가피 합니다.
오늘 정기점검 관계로 홈페이지 접속이 불가피 합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제가 모임에는 참석이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건 상황이 너무 명확해서 이것은 불가능을 잘못 썼다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 그 악마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 경우에는 문장만 딱 봐서는 '불가능' 쪽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원문을 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 

국어에 어울리는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요즘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텍스트라고 해봐야 카톡으로 대표되는 단문 위주의 채팅이나 영상의 보조적인 수단인 자막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올바른 문장을 익힐 기회가 적어진다. 억지로 시간을 내서 책을 읽거나 신문 기사를 읽으며 학습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문장구조가 점점 망가질 수밖에 없다.

그 방에 그 사람이 들어갔는데 그 방은 아름다운 흑색 수정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 흑색 수정은 피오르드 지방의 유명한 자원으로 마력을 담아내는 용기로 자주 사용되는데 가격도 매우 비싼데 그 방에서는 단순한 꾸미기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러한 점에서 이 방이 얼마나 사치스러운지 알 수 있는데 이 방을 주로 여왕이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는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솔직히 이렇게 번역되어 있으면 그냥 더 이상 읽기 싫다. 어차피 게임에서 지문이 중요한가? 퀘스트 보상이 중요하지. 긴 문장, 잦은 대명사의 활용(영어의 가주어 it 까지 번역하면 더 늘어난다) 은 읽는 사람을 매우 힘들게 만든다. 

내가 국어의 대가가 아니라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말은 긴 문장과는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해가지고요~ 했는데요~ 그런데 그게 ~였거든요~ 그래가지고요~' 라는 식으로 늘어지는 만연체는 그래도 대화에서는 말이 통한다. 표정, 몸짓, 중요 단어에 대한 강세도 있어서 긴 흐름 속에서도 주요 내용을 놓치지 않도록 보조해줄 수 있는 수단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장은 그렇지 않다. 영어의 관계대명사처럼 문장을 이어주는 장치도 없다. 언어 간 우열을 가리자는 말이 아니라 각각 특성이 다르니까 특성에 맞는 문장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 문장을 국어 문장으로 가져올 때는 차이를 반영해야 하는데 그냥 그대로 옮겨버리면 의미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사실 글을 쓴 이유는 몇몇 번역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점점 언어 수준이 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혹자는 한자를 안 써서 그렇다, 학교 교육이 잘못됐다, 여러가지 이유를 말하지만 언어 수준이 떨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국어도 학습이 필요한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어사전은 다들 한번씩 찾아보고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사용하는데 왜 국어는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틀렸으면 그렇구나 하고 다시 고쳐서 사용하면 되지 바득바득 왜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지. 모국어니까,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으니까 내가 맞고 니가 틀리다는 생각이 기본인 것 같기도 하다. 있어 보이는 단어를 사용하고 화려한 문장을 뽐내고 싶어하는 것도 자신의 기본기는 탄탄하다는 믿음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예전처럼 주변의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의존해서 자연스럽게 국어를 익히기 어렵다.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점점 국어와 동떨어진 자신만의 언어가 형성되어 버릴 것이다.

저기요, 신뢰합니다만 방금 사용하신 봇물 터지듯이라는 표현 너무 저속하지 않나요? 무리를 일으킬 수 있는 혐오 표현 지향해주세요.


마냥 웃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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