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시보다는 왠지 연말이 더 좋다. 뭔가가 새로 시작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뭔가 다 마무리 되는 것 같고 좋았던 일만큼이나 많았던 안좋았던 일도 다 훌훌 털어버려 낼 수 있을 것 같은 연말이 그래서 더 좋다.

 

이번 연말은 게임을 하며 시간을 떼우는 대신 가족과 왁자하게 시간을 보냈다. 웃고 떠들다 보니 코로나로 가라앉았던 무료한 일상들을 털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가볍게 털리지만은 않는 것도 있었다. 딱히 여름도 아닌데 괜히 좀 오싹할듯말듯한 얘기를 글로 써보려고 하는 것도 그 때의 찝찝함을 다 털어내고 싶기 때문이다.

 

 

1.

 

물놀이를 많이 하는 여름이면 매년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주변에도 자세히 구구절절 이야기 한 적은 없지만 또 막상 별거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해서 더 남들에게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절대로 뛰어 들어서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서 당황하게 되면 막 주변을 닥치는대로 끌어당기고 그러다 보면 미숙한 구조자들이 물에 빠진 사람에게 휘말려 버려 같이 사고를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직접 뛰어드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10살 쯤이었습니다. 가족끼리 물놀이를 갔습니다. 요즘은 어딜가도 사람이 북적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해수욕장을 잘 찾아보면 한산한 곳이 많았죠. 맨날 가는 해운대 말고 지금은 이름도 기억안나는 어딘가 굽이굽이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알음알음 찾아간 곳이라 해변에는 우리 가족만이 있었습니다. 텐트 비슷한 것을 자리에 펴고 펌프질로 고무뽀트도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형, 사촌형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이서 물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운전의 피곤함에 드러누우시고 어머니는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어린 우리들에게는 그 지루함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요. 왁자지껄 떠들며 흥분한 채 열심히 노질을 하다가 해변 쪽을 돌아보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무 작아서 안보일 정도였습니다. 갑자기 형이 장난으로 물을 뿌려댔습니다. 손이 작은 저는 물을 젓던 노로 물을 퍼서 말그대로 물싸다구로 되갚아 줬습니다. 사촌형도 괜히 껴서 막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노를 너무 세게 휘두르다가 노를 놓쳐버렸습니다. 노 하나 떨어트린 것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데 그때만 해도 어린 마음에 혼날 것 같아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일단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행동했습니다.

 '내가 들어가서 찾아올게, 잠수부1호, 잠수부1호, 입수~'

어디선가 본 장면을 흉내내며 물에 들어갔습니다. 

바닷물이 다 그렇듯이 뿌옇고 아무것도 안보였습니다. 그래도 수영에는 자신이 있던 터라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깊이는 한 2m 쯤이었습니다. 잠수해서 몇초 들어가보니 금방 손으로 바닥을 짚을 수 있었고 더듬더듬 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물살에 휩쓸렸는지 처음 노를 놓쳤던 부분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숨이 모자라 물 밖에 나왔습니다. 

'없냐? 그냥 가자'

형이 속편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잃어버린 건 나니까 자기는 안 혼난다 이건가 싶었습니다. 곧 찾는다며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노가 물살을 따라 갔을 법한 곳으로 잠수했습니다. 더듬더듬 하다보니 다행히 노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노가 바닥에 누워있었으면 찾기 어려웠을 텐데 물렁한 바닥에 꽂혀 있었습니다.

노를 들고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니 나오려고 했습니다. 노는 이미 물 밖으로 나갔고 저도 곧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공포영화나 만화에서 보면 물귀신? 같은 존재들이 사람의 발목을 잡아 당기는데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마치 저를 감싸던 물이 몸 전체를 붙잡는 기분이었습니다. 몸을 가볍게 둥둥 띄워주던 물들이 갑자기 땡땡하게 굳어버리는 느낌, 옴짝달싹 못하게 묶인 것 같았습니다.

 

고개를 빼꼼 내민 노를 보고 형들이 뭐라뭐라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와 찾았네 ㅋㅋ 야 장난치지 말고 빨랑 나와'
'저걸 찾았내네 빨랑 나와'

하면서 두 형들은 제가 장난치는 줄로만 알고 제 쪽으로 막 물을 뿌려댔습니다.

허우적허우적 

어떻게든 고개를 밖으로 빼내려다보니 본의아니게 노를 막 흔들어서 형들에게 반격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그렇게 한 몇 초간 물장난 아닌 물장난이 이어졌습니다.

'야야 이제 진짜 그만해 빨리 나와 이제 돌아가자 빨랑'

뭔가 불안한 형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말할려고 해도 입도 안벌어지고 입을 벌려도 물이 들어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꿀꺽꿀꺽 바닷물을 아무리 마셔도 다음 바닷물이 또 밀려들어왔습니다. 물에 뜨는 것도 아니고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마치 뭔가가 다른 누군가를 유인하려는 것처럼 물 밖도 안도 아닌 곳에서 소란만 떨 뿐이었습니다.

풍덩

뭔가 이상한걸 느낀 형이 물에 들어온 소리를 저도 들었습니다. 뭔가도 형이 들어온 걸 알아챈 것 같았습니다.  물이 느슨해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몸이 움직였습니다. 몸 따로 고개 따로 돌려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헤엄쳐오는 형의 표정이 보였습니다. 갑자기 오싹하며 덜컥 겁이 났습니다. 형이 더 이상 오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몸을 다 잡았습니다. 물 밖으로 박차고 나가 상반신이 나온 짧은 순간, 외쳤습니다.

'오지마! 오지마!, 노잡아 잡아줘' 하고 다시 물에 빠졌습니다. 

온 몸에 힘을 잃고 가라앉면서 노만 꼭 잡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노를 당기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이대로만 가만히 있으면 곧 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터였습니다. 그런데 또 몸이 움직였습니다. 어느새 코앞에 형이 있었습니다. 저는 떠오르기 시작했고 반대로 형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가라앉고 있는 형과 교차할 때 형의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형은 뭔가 본 것 같았습니다. 저를 본 것인지 뭔가를 본 것인지 아무튼 경악하는 표정이었습니다. 0.1초만 더 늦었으면 저는 형을 꽉 붙잡았을 겁니다. 무언가의 촉수같던 제 양팔이 덮쳐 들어간 곳에는 다행히 형은 없었고 물 뿐이었습니다. 형은 마치 무슨 일인지 안다는 듯이 저의 추격을 떨치기 위해 물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추격을 포기한 듯 느슨했던 물이 다시 저를 붙잡았고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아래에서부터 저를 물 밖으로 밀어내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형이 밑에서 제 다리를 받쳐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변으로 다시 돌아오니 노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아니 애초에 제가 노를 찾긴 찾았던 걸까요. 지금에 와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걱정한대로 아버지한테 잔뜩 혼이 났습니다. 노를 하나만 따로 팔지 않아서 보트를 다시 사야한대나 뭐래나. 큰 일을 겪고나니 혼내는 아버지 목소리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습니다. 

형은 그 이후 이 일에 대해 별 말이 없었습니다. 몇년이 지나고 형에게 그때 일을 물었습니다. 

'예전에 물에 빠졌을 때 형이 나 구해줬었잖아. 그때 왜 그렇게 표정이 희한했어?'
'뭐가? 물에 빠지다니?' 언제?'

정말로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굳이 더 자세히 물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물에 빠졌고 형이 구해줬다 이런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뭐가 뭐였을까 같이 혼란한 찝찝함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2.

그 찝찝함이 두려움으로 명확해진 것은 또 세월이 흘러 제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입니다. 제 입학 기념으로 해외로 가족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일정 중에 계곡 레프팅이 있었습니다. 물살도 별로 강하지 않아 말만 레프팅이지 고무보트에 탄 채로 둥둥 떠내려갈 뿐이었습니다. 코스가 지루하다는 걸 현지 직원도 알고 있었는지 갑자기 보트를 뒤집어서 탄 사람들을 모두 물에 빠트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우리를 깜짝 놀래켜주었습니다. 

도착지 캠프가 보일 때 쯤 보트를 한 번 더 뒤집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예상했기에 처음만큼 재미는 없었습니다. 거의 다 왔던 터라 사람들은 이왕 물에 빠진 김에 보트에 다시 타지 않고 그냥 헤엄을 치며 캠프로 향했습니다. 저도 보트는 직원한테 맡기고 수영해서 가려는데 어머니가 안보였습니다. 그제서야 뒤집어진 보트 안에서 뭔가 퉁퉁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풍덩

 

잠수를 해서 보트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뒤집어진 보트 아래에 어머니가 갇힌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하고 계셨습니다. 보트가 뒤집힐 때 미처 옆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뒤집어진 보트 밑에 깔린 것이었습니다.

그 때 단언컨데 어머니하고 눈이 마주치기 전에 분명히 다른 뭔가하고 눈이 마주쳤습니다. 거짓말처럼 어머니의 몸이 물 안에서 제 쪽으로 휙 도는 것이 보였습니다. 너무 놀랐고 그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너무 무서웠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이 때처럼

'엄마!!' 

하고 크게 불렀습니다.

그제서야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제서야 어머니가 저를 바라봤습니다. 

'물 얕아요! 땅에 발 닿으니까 침착해요!'

고개를 끄덕이신 것 같았습니다.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습니다. 구명조끼도 있었고 말한대로 물도 얕았습니다.

'오지마 오지마! 보트! 보트!' 

간신히 짜낸 어머니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뭔가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자리에 멈춰 보트를 올려 봤습니다. 혼자 들어올리기는 힘이 역부족이라 옆으로 힘껏 밀어냈습니다. 어두웠던 하늘이 열리고 물 밖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일어나보니 물도 가슴 깊이에 불과했습니다. 긴박했던 상황은 순식간에 평소로 돌아 왔습니다.  앞서가는 다른 일행도, 아버지와 형도 왠 소란이냐는 듯 우리를 잠깐 쳐다보곤 다시 땅 쪽으로 슬슬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새하얗게 질린 어머니 표정을 보니 부축이 필요할 것 같아 손을 뻗었습니다. 어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시곤 마치 저를 절대로 붙잡지 않겠다는 듯 양손을 꼭 자신의 가슴팍에 붙인 채 걸어나가셨습니다.

나중에 보니 10초도 안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해졌습니다. 제가 무엇을 본 것인지 그리고 어릴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지금도 종종 가족끼리 밥을 먹을 때 어머니는 그날 일을 물어보시곤 합니다. 
저는 항상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혹시 물에 빠진 사람이 보인다면 절대로 급한 마음에 뛰어들면 안됩니다. 주변의 튜브, 구명조끼, 줄 같은 것을 던져주는 것이 좋습니다. 붙잡히지 않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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